7월15일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 고(故) 박왕자 씨 영결식.
“큰일났어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김 전 부사장의 입은 바싹 타들어갔다. 그는 현대아산 베이징사무소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카운터파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걱정 마시라요. 전쟁 아닙네다. 게 좀 잡으려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1998년 ‘소떼 방북’으로 시작된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이날 오전 9시28분 발발한 연평해전으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평양과 현대그룹의 핫라인은 남북간 정규전 뒤에도 유지됐으며,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타격을 입지 않았다. 현대그룹과 평양의 신뢰 덕분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 뒤인 2000년 8월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방북한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요트로 불렀다. 김 위원장이 요트로 정 전 회장을 초청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김 위원장이 정 전 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심했소이다. 개성을 내줄 테니 가서 구경해보시오.”
김 위원장은 장고(長考) 끝에 현대그룹에 개성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현대그룹은 당초 서해공단 터로 해주를 원했다. 해주는 북한 해군의 핵심 거점인 만큼 북한으로선 개성이 덜 껄끄러웠으리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앞마당을 내주는 꼴은 비슷했다. 개성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北 군부대까지 빼면서 관광사업 호의
북한 군부는 개성 인근의 인민군 병력 일부를 후방으로 재배치했다. 남측 기업인들이 오가는 곳에 군사시설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군부의 안전 보장 없이는 공단 조성이 불가능했다. 북한 처지에선 ‘군대까지 뒤로 빼면서까지’ 개성공단을 추진한 셈이다.
7월11일 한국인 관광객이 북한군 초병에게 피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금강산 관광지구의 장전항 역시 북한군의 핵심 군사기지였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을 준비하면서 잠수함 기지를 폐쇄했으며, 미사일 부대를 후방으로 옮겼다. 북한 군부도 남북경협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그토록 남북을 자유롭게 훨훨 날고 싶어하던 회장님이 오늘따라 더욱 그립습니다. 살아 계실 적 못 다 이룬 꿈을 꼭 이뤄드리고 싶습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4월29일 남편인 정 전 회장을 기리는 작곡발표회에 참석해 사부곡(思夫曲)을 읊었다. ‘개성’과 ‘금강산’은 정 전 회장에게 처음엔 비즈니스였지만 말년엔 통일사업이었다고 한다. 정 전 회장은 생전에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개성시장을 해보는 것이다.”
현대그룹 대북사업의 ‘두 번째 위기’는 2003년 8월 정 전 회장의 죽음에서 비롯했다. 당시 언론은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이 선장을 잃고 표류하리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현 회장은 정 전 회장의 죽음에서 비롯한 ‘두 번째 위기’를 넘어섰다.
그가 ‘정주영가(家) 며느리’에서 ‘현대그룹 회장’으로 변신한 지 올해로 만 5년. 그간 대북사업과 관련해 두 번의 위기가 더 있었다. ‘세 번째 위기’는 2005년 김윤규 당시 현대아산 부회장의 거취 문제로 북한이 현 회장을 압박하면서 닥쳤다. ‘네 번째 위기’는 2006년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
금강산 관광은 올해로 10돌을 맞았다. 현대아산은 ‘함께한 10년, 함께할 100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그런데 ‘다섯 번째 위기’가 금강산에서 터진 것이다.
7월11일 동틀 무렵 북한군 초병이 관광객 박왕자(53) 씨에게 총을 쏜 것이 ‘우발적 사건’(초병의 과잉 대응)인지, ‘의도된 도발’(남북 접촉지역의 긴장 유발 전술)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을 ‘역도(逆徒)’라고 지칭한 뒤부터 개성공단, 금강산 등 ‘남북 접촉면’에서 긴장 수위를 높여왔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북한 군부는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3월27일 개성공단의 남북경제협력사무소에서 한국 당국자 11명을 추방한 뒤 북한 군부는 당국자 국경 출입을 통제하고, 대남조치를 발표하는 등 사실당 대남 압박의 전면에 서 있다. 대북 소식통 A씨는 4월 초 ‘힘이 실린’ 북한 군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금강산과 개성공단이 위기 국면을 맞을 것 같다. 이명박 정부를 바라보는 북한 군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영관급 장교들도 들끓고 있다. 군대까지 뒤로 뺐는데 ‘이게 뭐냐’며 본때를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의 분석과 예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이번 위기는 현대그룹이 네 차례 맞이한 위기와는 ‘결’이 다르다. 현대그룹과 평양의 신뢰가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그룹과 평양이 삐걱거린 것은 세 번째 위기인 ‘김윤규 사태’ 때부터다. 금강산과 개성에서의 비즈니스는 계속됐지만 평양이 현대그룹을 보는 시선은 한동안 싸늘했다. 현 회장이 대북사업에서 전기를 다시 마련한 계기는 지난해 10월 열린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김정일-현정은 면담이 성사되면서 신뢰가 복구된 듯했다. 12월8일 현 회장과 최승철 전 북한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금강산 비로봉 코스를 함께 답사할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그러나 남측의 정권이 바뀌고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대북사업은 벼랑 끝으로 내달렸다.
북한 통일전선부는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숙정(肅正)으로 쑥대밭이 됐다. 개성공단에서 남측 기업, 관료, 정치인 등과 접촉하던 담당 일꾼들이 걸려들었다. 수만 달러를 챙긴 하위직은 물론, 수백만 달러의 뇌물을 받은 고위직도 드러났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당시 여권 실세들과 핫라인을 뚫었던 최 전 부부장도 숙정의 칼을 비켜날 수 없었다. 남측의 정권교체기에 평양의 대북 라인이 물갈이된 것이다. 현대아산은 그때부터 평양의 고위층과 연결되지 못했다. 현대아산 임원들이 만나는 북한 인사의 격도 떨어졌다. 현대아산이 접촉할 수 있는 인사들의 등급은 과거와 비교하면 한마디로 ‘아니올시다’다.
현대그룹은 현재 평양으로 통하는 ‘핫라인’을 갖고 있다. 그런데 카운터파트들의 힘이 약해지면서 핫라인으로서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예로,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조사 명목으로 방북한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은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 인사 3명을 만나는 데 그쳤다.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은 총격사건을 일으킨 군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위치가 아니다.
기업 차원의 올바른 접근 방법 필요
노무현-김정일 회담의 산물인 백두산 관광이 무산되고 핫라인마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대그룹이 위기를 돌파할 수단을 찾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 회장이 대북사업에서 ‘길을 잃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다. 문제는 현대그룹이 이번 위기를 돌파할 ‘라인’과 ‘수단’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남북관계 경색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다섯 번째 위기’는 ‘파국’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살아 계실 적 못 다 이룬 꿈을 꼭 이뤄드리고 싶다”는 현 회장의 소망이 ‘바람 앞 촛불’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 회장은 총격사건 전에 대북사업 재편을 고려했다고 한다. “기존 통로와는 다른 루트를 확보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현대그룹 안팎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그룹은 6월 전략기획본부 사장으로 하종선 전 현대해상화재 대표를 임명했는데, 그룹의 중장기적 경영전력 개발에 주력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가 ‘포스트 윤만준’으로서 대북사업을 이끌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가 지방자치단체 등의 대북사업을 챙기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 북한전문가는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10년은 겉으로 드러난 공과로만 따져선 안 된다. 현대그룹은 분단 60년 가운데 10년을 이끌었고 또 장식했다. 그러나 앞으로 현대그룹은 기업 차원의 올바른 접근을 해야 한다.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보호받던 통로’에만 연연했던 게 위기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현대그룹은 일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논란이 많긴 하지만 개성과 금강산을 잘 가꿔나가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