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우, 꼭 읽어야겠다고 ‘쓸모’를 느끼는 책들은 크게 다음 세 가지다. 첫째는 우리가 사는 사회의 흐름을 올바로 짚어주고 현상 뒤에 숨은 본질을 밝혀 참으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책이다. 이른바 사회과학적인 비판능력과 삶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책들이다.
대학시절에는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백기완 선생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이었다. 최근에는 마르틴&슈만의 ‘세계화의 덫’, 초스도프스키의 ‘빈곤의 세계화’, 코튼의 ‘기업이 세계를 지배할 때’, 해리 클리버의 ‘사빠띠스따’, 노엄 촘스키의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 등이 있다.
둘째로 내가 찾는 것은 좀더 실용적인 책이다. 우리 주변의 들풀과 나무, 산나물, 꽃들의 이름과 성질을 자상하게 가르쳐주거나 곤충과 동물의 이름 및 속성들을 가르쳐주는 책들이다. 또 스스로 흙집 짓는 방법이나 텃밭 가꾸기 등 스스로 뭘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포함된다.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들이다. 정호경 신부의 ‘손수 우리집 짓는 이야기’는 삶의 기술뿐만 아니라 지혜도 알려준다. 대신 컴퓨터 관련 서적, 주식투자나 재산증식 관련 서적, 처세술 책에는 별 관심이 없다.
셋째는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도록 자극을 주는 책을 본다. 시나 소설도 좋고 철학적 사유를 촉진하는 책도 좋다. 대표적인 예로는 두 달마다 나오는 ‘녹색평론’이나 법정 스님의 수필집 ‘산에는 꽃이 피네’,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 숲’, 김종철 선생의 ‘간디의 물레’, 윤구병 선생의 ‘잡초는 없다’ 같은 것이다.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나 니어링 부부의 공동작품 ‘조화로운 삶’도 감동이 크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나 스스로 새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아니, 좋은 책은 바로 그 읽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준다. 일종의 해방감이랄까. 이것은 직접 체험해야 한다.
요즘 내가 읽는 것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종이 위에 인쇄된 것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에 올려진 것을 액정화면으로 읽는 것이다. 액정화면을 통한 읽기는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검색해 본다는 의미에서는 매우 유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읽는 행위가 아니다. 단지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는 것일 뿐이다. 또 책에 대해 요약된 정보가 인터넷에 넘치지만 그것만으로 책 전체를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직접 책을 보고 확인한다. 나는 책시장 전체를 분석해서 그 흐름을 제공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파악해야 한다. 하루에도 신간은 100여권 가까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책을 대강이라도 훑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번역서는 머리말과 결론부터 읽는다.
외국 책은 보통 머리말에 자기가 쓰고자 하는 내용을 충실하게 요약 정리하고 있다. 본문은 보통 자기가 쓰고자 하는 주제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구체적 논증이다. 특별하게 관심 있는 책이 아니면 보통 이 단계에서 대강의 내용이 파악된다.
국내 책은 출판사, 저자, 주제, 책 만들기의 충실도를 염두에 두고 머리말과 1, 2장을 읽는다. 이 정도만 읽어도 그 책의 탄생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마케팅책 등 내가 관심이 많은 분야는 찾아보기를 먼저 읽는다. 새로운 용어나 인물이 많이 나오는 책은 정독을 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책은 대강 넘겨보고 만다. 하지만 국내 책은 ‘찾아보기’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아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걸러진 책은 정독한다. 그러나 골라놓고 읽지 못하는 책 또한 적지 않다. 그런 책들 중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래 유지되는 책은 나중에라도 꼭 읽는다. 그러나 그 책들이 모두 좋은 책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언젠가 읽기 위해 ‘꼬불쳐둔’ 좋은 책들의 향기를 맡으며 나만의 은밀한 독서를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대학시절에는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백기완 선생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이었다. 최근에는 마르틴&슈만의 ‘세계화의 덫’, 초스도프스키의 ‘빈곤의 세계화’, 코튼의 ‘기업이 세계를 지배할 때’, 해리 클리버의 ‘사빠띠스따’, 노엄 촘스키의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비비안느 포레스테의 ‘경제적 공포’ 등이 있다.
둘째로 내가 찾는 것은 좀더 실용적인 책이다. 우리 주변의 들풀과 나무, 산나물, 꽃들의 이름과 성질을 자상하게 가르쳐주거나 곤충과 동물의 이름 및 속성들을 가르쳐주는 책들이다. 또 스스로 흙집 짓는 방법이나 텃밭 가꾸기 등 스스로 뭘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도 포함된다.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들이다. 정호경 신부의 ‘손수 우리집 짓는 이야기’는 삶의 기술뿐만 아니라 지혜도 알려준다. 대신 컴퓨터 관련 서적, 주식투자나 재산증식 관련 서적, 처세술 책에는 별 관심이 없다.
셋째는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도록 자극을 주는 책을 본다. 시나 소설도 좋고 철학적 사유를 촉진하는 책도 좋다. 대표적인 예로는 두 달마다 나오는 ‘녹색평론’이나 법정 스님의 수필집 ‘산에는 꽃이 피네’,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 숲’, 김종철 선생의 ‘간디의 물레’, 윤구병 선생의 ‘잡초는 없다’ 같은 것이다.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나 니어링 부부의 공동작품 ‘조화로운 삶’도 감동이 크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나 스스로 새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아니, 좋은 책은 바로 그 읽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해준다. 일종의 해방감이랄까. 이것은 직접 체험해야 한다.
요즘 내가 읽는 것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종이 위에 인쇄된 것을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에 올려진 것을 액정화면으로 읽는 것이다. 액정화면을 통한 읽기는 내게 꼭 필요한 정보를 검색해 본다는 의미에서는 매우 유리하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읽는 행위가 아니다. 단지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는 것일 뿐이다. 또 책에 대해 요약된 정보가 인터넷에 넘치지만 그것만으로 책 전체를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직접 책을 보고 확인한다. 나는 책시장 전체를 분석해서 그 흐름을 제공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책을 파악해야 한다. 하루에도 신간은 100여권 가까이 쏟아져 나온다. 그 많은 책을 대강이라도 훑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번역서는 머리말과 결론부터 읽는다.
외국 책은 보통 머리말에 자기가 쓰고자 하는 내용을 충실하게 요약 정리하고 있다. 본문은 보통 자기가 쓰고자 하는 주제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구체적 논증이다. 특별하게 관심 있는 책이 아니면 보통 이 단계에서 대강의 내용이 파악된다.
국내 책은 출판사, 저자, 주제, 책 만들기의 충실도를 염두에 두고 머리말과 1, 2장을 읽는다. 이 정도만 읽어도 그 책의 탄생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마케팅책 등 내가 관심이 많은 분야는 찾아보기를 먼저 읽는다. 새로운 용어나 인물이 많이 나오는 책은 정독을 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책은 대강 넘겨보고 만다. 하지만 국내 책은 ‘찾아보기’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아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걸러진 책은 정독한다. 그러나 골라놓고 읽지 못하는 책 또한 적지 않다. 그런 책들 중에서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래 유지되는 책은 나중에라도 꼭 읽는다. 그러나 그 책들이 모두 좋은 책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언젠가 읽기 위해 ‘꼬불쳐둔’ 좋은 책들의 향기를 맡으며 나만의 은밀한 독서를 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