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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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잠수함 ‘연청’ 다시 부상

올해로 창립 20주년…16대 의원만 20명 배출한 ‘DJ 친위대’

  • 입력2005-08-03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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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 잠수함 ‘연청’ 다시 부상
    ‘DJ 별동대’로 통하며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의 선봉에 섰던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회장 민주당 김영환 의원·약칭 연청)가 올해로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5가 모자빌딩 3층에 있는 연청 사무실도 평소와 달리 요즘은 북적대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7월23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리는 ‘제12회 전국 대표자 대회’ 준비 때문이다. 연청은 2000여명의 대의원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 행사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연청의 박상훈 사무부총장은 “대표자 대회와는 별도로 조용하게나마 뭔가 의미 있는 행사를 가질 생각”이라고 말했다.

    80년 5월11일 창립된 연청은 17년 동안의 ‘대장정’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그러나 막상 그 꿈이 현실화하자 연청은 존재 자체가 의문시될 정도로 철저히 물밑으로 잠수했다. ‘친위대’ 이미지가 워낙 강해 김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정권교체 4개월 만인 98년 4월10일 여의도백화점 6층에 있던 100여평의 사무실을 40여평으로 대폭 축소해 당산동의 허름한 사무실로 옮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상근 직원도 축소했고, 사무총장도 없이 사무부총장 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대선 이후 행해진 각종 논공행상에서 연청은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공로를 충분히 인정받았다. 98년 2월 ‘15대 대선 승리 연청 기념식’이나 그해 12월의 ‘15대 대선 승리 1주년 기념식’, 99년 2월 김대통령 취임 1주년, 99년 12월 대선 승리 2주년 등을 맞아 수백명의 연청 핵심 간부들이 김대통령의 표창이나 감사장 등을 받았다. 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에는 연청 회원 1500명이 초청받아 참석했다. 총 초청자 2만여명의 7%에 해당하는 숫자다. 김대통령은 또 대통령 취임 전에 연청 주요 간부들을 불러 식사를 같이 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연청 출신 인사들은 정권 교체 뒤 지자체나 국영기업체 등에도 많이 진출했다. 현직에 있는 사람만 대략 훑어봐도 김성수 경기도 정무부지사, 신극정 한국공항공단 감사, 안영칠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감사, 김춘호 전자부품연구원 원장, 민상금 한국토지공사 감사, 장남진 농업기반공사 감사, 김영춘 서울지하철 공사 감사, 송선근 남해화학 회장 등이 있다. 또 청와대 행정관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다.



    정권교체 후 한자리를 차지했던 연청 출신 인사로는 민주당의 배기선(전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 배기운(전 보훈복지공단 이사장) 김덕배 의원(전 경기도 정무부지사)과 엄대우 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많은 사람들이 진출하다 보니 일부 인사들의 경우 문제가 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웬만한 사람이면 모두 국영기업체 감사 등으로 나가는 등 “못 나가는 사람이 바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연청 출신에 대한 시샘의 눈길이 없지 않다. “고생한 것은 알지만 연청 출신만 너무 잘나가는 독식 구조가 생긴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연청은 민주당의 엄연한 공식조직이다. 민주당이 2000년 6월 발행한 당헌-당규집 3장(‘집행기관’편)에는 연청이 당무위원회 정책위원회 의원총회 등과 동렬에 올라 있다. 당 청년조직 등과 완전 분리된 하나의 별도 조직으로서 연청의 특별한 위상을 인정한 것. “청년 조직을 강화하고 청년에 관한 정책 수립 및 집행을 위해 연청을 둔다”고 당헌-당규집은 설명하고 있다.

    18개 시-도지부와 300여개 지회를 두고 있는 연청은 현재 회원이 40만명 정도라고 주장한다. 박 사무부총장은 “97년 대선 때 회원이 7만명 정도 늘었다”고 전했다. 각 시-군별로 지회가 있기 때문에 선거구별로 지구당이 있는 정당조직보다 더 강한 조직력을 갖고 있다.

    정권교체 이후 연청 회원들 면면도 많이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 유지 등이 새로 가입해 70% 정도의 구성원이 바뀌었다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과거 ‘돌격대’ 이미지가 많이 퇴색하고 옛날 여당의 조직처럼 정권 유지의 기간 세력쯤으로 바뀐 셈이다.

    연청의 운영은 철저한 독립채산제다. 중앙회, 각 시`-`도지부, 시`-`군`-`구 지회로 나뉘어 각자 알아서 운영토록 하고 있다. 당에 소속된 조직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중앙당으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지 않는다. 운영과 활동에서도 당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

    연청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인 민주당 김홍일 의원. 김의원은 연청 명예회장(김대중 대통령은 명예고문)이다. 연청 회칙 16조는 “명예회장은 회무 전반에 대하여 지도-자문을 행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연청의 실질 지도자가 김의원임을 암시한 대목이다. △김홍일 동지 후원 아래 후광(後廣·김대통령 아호) 노선의 청년 전위조직으로 가칭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의 옛이름) 결성 결의(1980. 2. 21) △5·17 쿠데타로 강제 해체된 뒤 김홍일 동지 등 30여명이 ‘주선회’(酒仙會)로 재결속(1981. 8. 13) 등 연청의 약사(略史)는 김의원이 연청 창립을 주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김의원은 정권교체 뒤 거의 연청 사무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괜한 구설수에 오를 필요가 없다는 내부 판단 등이 그로 하여금 표면적으로 연청을 멀리하게 만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청 출신’이란 꼬리표는 민주당에서 하나의 ‘성골(聖骨) 집단’으로 통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같은 위력은 연청이 문희상(초대, 6대 중앙회장) 김옥두(7, 8대 중앙회장) 정균환(2대 중앙회장) 김충조(3, 4대 중앙회장) 의원 등 16대 국회의원 20명을 배출한 막강 파워집단이라는 점에서도 입증된다. 한 조직에서 이렇게 많은 국회의원을 배출한 경우는 거의 없다. 14대 때는 6명, 15대 때는 15명을 배출했다. 위의 면면에서 확인되듯 역대 사무총장이 거의 연청 출신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김옥두 총장과 문희상 의원은 당내 동교동계의 핵심이기도 하다.

    ‘김대중 대통령’이라는 목표가 사라진 98년 내내 연청은 새로운 좌표 설정을 하지 못하고 활로 찾기에 고심했다. 그러다가 99년 초 사회봉사 활동인 ‘한마음 운동’을 시작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당시의 상황을 연청 내부 문건은 “연청의 목표 설정과 주력 사업에 대한 고민이 각 지역조직의 책임 주체들에 의해 대두됐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부터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연청’ ‘소외 계층과 이웃들을 위한 연청’이라는 기치를 내걸기 시작했다.

    연청은 창립 20주년을 맞아 한 단계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박 사무부총장은 “김대중 정부의 개혁작업이 지역주민들에게까지 스며들지 못하고 있다”며 “조직을 활성화해서 남북통일과 개혁작업을 완수하는 데 연청이 전도사 역할을 하겠다”고 최근 분위기를 전했다. 연청의 이런 움직임은 집권 후반기에 접어드는 DJ 정부를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할 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도처에서 제기되는 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과거 YS의 민주산악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연청 또한 2002년을 내다보면서 또 한 차례 용틀임을 하고 있는 것.

    1980년 5월11일 경기도 의정부시 수락산 옥류폭포에서 회원 100여명이 모여 창립한 연청. 창립 20주년을 맞아 정치권에 어떤 세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어떤 방향성을 설정할 것인지 전도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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