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1일 오전 11시, 서울 가리봉동 A건물 앞은 천막으로 만들어진 간이 특판매장으로 가득하다. 속칭 ‘땡처리’라고 불리는 특판매장은 재고상품을 최고 90%까지 할인하거나 균일가로 판다. 그런데 물건을 사는 사람은커녕 드나드는 사람조차 뜸하다. 그래서 상인들은 천막 앞 벤치에 앉아 넋을 놓고 있다.
대부분의 특판매장은 남성 정장을 판매한다. 9만9000원부터 5만원, 3만원짜리도 있다. 매력적인 가격이다. 한 판매원은 “그럼에도 소비자들의 위축된 소비심리를 유혹하지는 못한다”고 호소한다.
“소비자들은 10만원 이상이면 구경도 하지 않아요. 물론 판매가 안 돼 재고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비자들이 자꾸 싼 것을 찾으니까 예년보다 실외 특판매장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특판을 통해 싸게 파는데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요. 사실 계절적으로 요즘이 남성복 성수기죠. 양복에다 코트까지 팔게 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성수기고 뭐고 없어요. 어떤 날은 한 벌도 못 팔 때도 있는걸요. 다들 힘들다고 난립니다.” 그에 따르면 근처 특판매장에서 판매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매장 사장이라고 한다. 장사가 너무 안 되자 예전에는 관리만 하던 사장들이 직원을 줄이고 직접 나와 판매하고 있다는 것.
고급 브랜드 파격가에도 소비자들 꿈쩍 안 해
한 매장에서 모자(母子)가 쇼핑을 하고 나온다. 대학 졸업반인 아들이 면접을 볼 예정이라 정장을 사러 왔다는 어머니 임모(51) 씨.
“주가는 끝도 없이 떨어지고, 물가며 공과금은 오르고…. 그러니 요즘 같아선 소비할 엄두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남편 양복을 입으라고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첫 면접인데 안 되겠다 싶었죠. 큰맘 먹고 양복 한 벌 사주려고 나왔어요. 백화점은 못 가겠고 만만한 가리봉동 상설 할인매장으로 왔는데, 여기도 만만치 않네요. 그래서 매장 안에서 못 사고 밖에서 10만원짜리 양복을 샀어요.”
그나마 남성 정장은 낫다. 여성복 상황은 더 나쁘다고 한다. 모 여성 전문 브랜드가 ‘창고 大개방’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특별행사를 진행한다. 그런데 막상 행사장을 가보니 손님보다 판매원이 더 많다. 주부 박모(34) 씨는 보채는 네 살짜리 아들을 달래며 한 시간째 옷만 입었다 벗었다 했다.
“요즘 같은 때 백화점에서 제값 주고 산다는 것은 꿈도 못 꿔요. 최대 90%까지 할인한다고 해서 마음먹고 사러 왔는데, 막상 사려니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어요.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10만원 하면 5만원만 하지 싶고, 5만원 하면 3만원만 하지 싶네요. 아무래도 못 살 것 같아요. 그냥 입던 옷 입어야죠, 뭐.”
박씨는 전업주부인 경우 남편이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욱 자신의 옷을 사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특히 요즘 같은 때는 남편 월급만으로 살아가기가 빠듯해 더욱 그렇다고.
낮 12시가 조금 넘자 유모차 부대가 특판매장 숲을 빠져나간다. 광명에서 왔다는 세 명의 주부는 두 시간 넘게 구경만 하다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이들은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온 것은 아니란다. 돌아다니다가 싸고 좋은 물건을 건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 왔다는 것. 주부 이모(33) 씨는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굶을 수는 없으니 쌀이며 반찬거리는 사야 하지만, 벗고 다니지 않는 한 옷은 꼭 사지 않아도 되잖아요. 요즘 같은 시절에 옷은 사치품이죠.”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먼저 타격을 보는 것이 의류업체라고 한다. 이는 백화점에 가보면 더욱 실감난다. 아무리 비싸도 없어서 못 판다며 “우리는 No-sale 브랜드”라고 콧대 높이던 고급 브랜드들이 하나씩 자존심을 꺾고 세일에 나선다. 심지어 특별행사장을 꾸려 50% 이상 파격적인 할인으로 재고상품을 정리한다. 예년 같으면 소비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소비자들이 꿈쩍 않는다고 한다.
서울 을지로 L백화점 여성의류 매장 직원은 요즘은 세일 안내와 상품권 행사 안내 문자를 보내는 게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단골고객들의 발길마저 뜸하다”며 “돈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소비를 해줘야 하는데, 그들마저 위축돼 있으니 큰일”이라고 하소연했다.
오후 4시,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앞이 시끄럽다. ‘땡처리’ 업체가 뜬 것. 개인이 운영하는 ‘땡처리’ 특판업계는 외환위기 시절 망해가는 브랜드 의류를 발판 삼아 서울 동대문 보세시장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마이크를 잡고 목이 쉬도록 손님을 불러 모으는 정모(27) 씨. 3년 동안 특판 일을 해왔다는 그는 요즘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상인들 “1997년보다 더 힘들다” 한목소리
“연초에 경기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가 언론에서 나와도 걱정하지 않았어요. 백화점 같은 곳이나 타격을 보지, 땡처리는 괜찮겠지 싶었던 거죠. 오히려 어려울수록 잘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점점 매출이 줄어들다 환율이 오르면서부터는 상황이 더 나빠졌어요. 우리가 파는 옷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떼오는 것인데, 환율이 오르니 원단비가 올라가고 그러면 자동으로 옷값이 오르잖아요. 하지만 ‘땡처리’의 생명은 싸게 파는 것이라 옷값을 마냥 올릴 수는 없었죠. 그러다 보니 남는 게 없어요. 지난해엔 하루 1000만원까지도 매출을 올렸는데, 요즘은 그 절반으로 줄었죠.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캐주얼 점퍼에서부터 셔츠, 운동복까지 다양한 옷들이 매장 밖까지 진열돼 있다. 비싸야 5만원, 대부분이 5000원에서 1만원 선이란다. 손해 보고 파는 것이 재고 남기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3000원에 파는 것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싸게 파는 것만 사가고, 그나마 손실을 충당할 수 있는 것은 잘 사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정도예요. 올 들어 수많은 땡처리 업체가 손들고 일을 접었죠. 2~3년 전만 해도 서울에만 50~60개 땡처리 업체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절반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불황이 오면 땡시장은 활황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땡처리도 불황이다. ‘불경기가 우리에겐 호황’이라는 업계 통설이 무색할 정도다.
상인들은 소비자들이 꾹 닫은 지갑을 열어주기 바라고,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어도 돈이 없다 하고, 이구동성으로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고 말한다.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한데, 늦가을 햇살은 유난히 따스하게 내리쬔다. 괜스레 그 햇살이 얄밉다.
대부분의 특판매장은 남성 정장을 판매한다. 9만9000원부터 5만원, 3만원짜리도 있다. 매력적인 가격이다. 한 판매원은 “그럼에도 소비자들의 위축된 소비심리를 유혹하지는 못한다”고 호소한다.
“소비자들은 10만원 이상이면 구경도 하지 않아요. 물론 판매가 안 돼 재고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비자들이 자꾸 싼 것을 찾으니까 예년보다 실외 특판매장이 많아졌어요. 그런데 특판을 통해 싸게 파는데도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요. 사실 계절적으로 요즘이 남성복 성수기죠. 양복에다 코트까지 팔게 되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성수기고 뭐고 없어요. 어떤 날은 한 벌도 못 팔 때도 있는걸요. 다들 힘들다고 난립니다.” 그에 따르면 근처 특판매장에서 판매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매장 사장이라고 한다. 장사가 너무 안 되자 예전에는 관리만 하던 사장들이 직원을 줄이고 직접 나와 판매하고 있다는 것.
고급 브랜드 파격가에도 소비자들 꿈쩍 안 해
한 매장에서 모자(母子)가 쇼핑을 하고 나온다. 대학 졸업반인 아들이 면접을 볼 예정이라 정장을 사러 왔다는 어머니 임모(51) 씨.
“주가는 끝도 없이 떨어지고, 물가며 공과금은 오르고…. 그러니 요즘 같아선 소비할 엄두가 나지 않아요. 그래서 남편 양복을 입으라고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첫 면접인데 안 되겠다 싶었죠. 큰맘 먹고 양복 한 벌 사주려고 나왔어요. 백화점은 못 가겠고 만만한 가리봉동 상설 할인매장으로 왔는데, 여기도 만만치 않네요. 그래서 매장 안에서 못 사고 밖에서 10만원짜리 양복을 샀어요.”
그나마 남성 정장은 낫다. 여성복 상황은 더 나쁘다고 한다. 모 여성 전문 브랜드가 ‘창고 大개방’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특별행사를 진행한다. 그런데 막상 행사장을 가보니 손님보다 판매원이 더 많다. 주부 박모(34) 씨는 보채는 네 살짜리 아들을 달래며 한 시간째 옷만 입었다 벗었다 했다.
“요즘 같은 때 백화점에서 제값 주고 산다는 것은 꿈도 못 꿔요. 최대 90%까지 할인한다고 해서 마음먹고 사러 왔는데, 막상 사려니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어요.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10만원 하면 5만원만 하지 싶고, 5만원 하면 3만원만 하지 싶네요. 아무래도 못 살 것 같아요. 그냥 입던 옷 입어야죠, 뭐.”
박씨는 전업주부인 경우 남편이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더욱 자신의 옷을 사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특히 요즘 같은 때는 남편 월급만으로 살아가기가 빠듯해 더욱 그렇다고.
낮 12시가 조금 넘자 유모차 부대가 특판매장 숲을 빠져나간다. 광명에서 왔다는 세 명의 주부는 두 시간 넘게 구경만 하다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이들은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온 것은 아니란다. 돌아다니다가 싸고 좋은 물건을 건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 왔다는 것. 주부 이모(33) 씨는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불경기 때가 오히려 호황이라는 땡처리 시장에도 찬바람이 분다.
경기가 나빠지면 가장 먼저 타격을 보는 것이 의류업체라고 한다. 이는 백화점에 가보면 더욱 실감난다. 아무리 비싸도 없어서 못 판다며 “우리는 No-sale 브랜드”라고 콧대 높이던 고급 브랜드들이 하나씩 자존심을 꺾고 세일에 나선다. 심지어 특별행사장을 꾸려 50% 이상 파격적인 할인으로 재고상품을 정리한다. 예년 같으면 소비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소비자들이 꿈쩍 않는다고 한다.
서울 을지로 L백화점 여성의류 매장 직원은 요즘은 세일 안내와 상품권 행사 안내 문자를 보내는 게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단골고객들의 발길마저 뜸하다”며 “돈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소비를 해줘야 하는데, 그들마저 위축돼 있으니 큰일”이라고 하소연했다.
오후 4시, 지하철 2호선 구로디지털단지역 앞이 시끄럽다. ‘땡처리’ 업체가 뜬 것. 개인이 운영하는 ‘땡처리’ 특판업계는 외환위기 시절 망해가는 브랜드 의류를 발판 삼아 서울 동대문 보세시장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마이크를 잡고 목이 쉬도록 손님을 불러 모으는 정모(27) 씨. 3년 동안 특판 일을 해왔다는 그는 요즘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상인들 “1997년보다 더 힘들다” 한목소리
“연초에 경기가 안 좋아지고 있다는 얘기가 언론에서 나와도 걱정하지 않았어요. 백화점 같은 곳이나 타격을 보지, 땡처리는 괜찮겠지 싶었던 거죠. 오히려 어려울수록 잘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죠. 점점 매출이 줄어들다 환율이 오르면서부터는 상황이 더 나빠졌어요. 우리가 파는 옷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떼오는 것인데, 환율이 오르니 원단비가 올라가고 그러면 자동으로 옷값이 오르잖아요. 하지만 ‘땡처리’의 생명은 싸게 파는 것이라 옷값을 마냥 올릴 수는 없었죠. 그러다 보니 남는 게 없어요. 지난해엔 하루 1000만원까지도 매출을 올렸는데, 요즘은 그 절반으로 줄었죠. 앞으로가 더 걱정입니다.”
캐주얼 점퍼에서부터 셔츠, 운동복까지 다양한 옷들이 매장 밖까지 진열돼 있다. 비싸야 5만원, 대부분이 5000원에서 1만원 선이란다. 손해 보고 파는 것이 재고 남기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3000원에 파는 것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싸게 파는 것만 사가고, 그나마 손실을 충당할 수 있는 것은 잘 사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정도예요. 올 들어 수많은 땡처리 업체가 손들고 일을 접었죠. 2~3년 전만 해도 서울에만 50~60개 땡처리 업체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절반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불황이 오면 땡시장은 활황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땡처리도 불황이다. ‘불경기가 우리에겐 호황’이라는 업계 통설이 무색할 정도다.
상인들은 소비자들이 꾹 닫은 지갑을 열어주기 바라고, 소비자들은 지갑을 열어도 돈이 없다 하고, 이구동성으로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고 말한다.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한데, 늦가을 햇살은 유난히 따스하게 내리쬔다. 괜스레 그 햇살이 얄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