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5일 토요일, 길은 질퍽거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진눈깨비 그리고 칼바람. 이런 악천후에 맨손으로 오르기도 힘든 설악산 대청봉을 배낭과 장비까지 메고 오르는 이들이 있었다. “힘든 건 사실이지만 히말라야는 더 춥겠지, 오늘 이만큼 더 익숙해졌구나라고 생각하면 힘이 나요.”(고광례 대원 )“열 사람 모두 혼연일체가 돼 똑같은 속도로 걷는데, 정말 멋있어요.”(오의숙 대원)
남다른 각오와 열정으로 산을 타는 이들은 바로 간·신장 이식자와 기증자 10명으로 구성된 ‘히말라야 생명나눔 원정대’(이하 원정대)다. 일반인처럼 혹은 일반인보다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자 원정대는 12월11일 히말라야 ‘아일랜드 피크’(해발 6189m) 등정에 도전한다(정상 정복은 12월25일 예정).
원정대는 서울대병원 간이식팀과 제약회사 한국노바티스의 후원으로 출범했다. 40여 명의 지원자를 모집한 뒤 트레이닝과 의료검진을 거쳐 최종 대원 10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지난 9월부터 매주 토요일 서울 북한산과 도봉산을 교대로 오르고 암벽등반 연습을 하는 등 체계적인 훈련을 이어오고 있다. 설악산은 마무리 훈련 코스.
9월부터 매주 체계적 연습
“처음엔 힘들었는데, 정상에 올라서서 구름에 덮인 도시를 봤을 때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지정혁 대원)
“제가 장기를 이식받지 못했다면 이렇게 대청봉에도 오르지 못했을 텐데…. ‘대청봉’ 세 글자가 새겨진 비석을 보니 아, 감격스러워요.”(김상돈 대원)
이날 거뜬히 대청봉에 오른 김상돈(47) 씨는 2002년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아내가 간을 기증하고자 했지만 그와 혈액형이 달라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받겠다고 신청한 후 3년간 두통 등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수술을 무작정 기다렸다. 운동 삼아 잠깐 산책하고 돌아와 코피를 터뜨리는 환우들을 바라보는 일도 그에겐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생과 사를 오가던 어느 날, 그는 한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받을 수 있었다. 한두 달만 늦었어도 몸이 쇠약해져 수술조차 받을 수 없었던 그이기에 더욱 감사한 일이었다. 그는 이번 ‘히말라야 생명나눔 프로젝트’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장기기증에 관심을 갖길 간절히 원하며 산을 올랐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
“지방간이 약간 있었는데, 초음파 검사를 했더니 지금은 다 없어졌어요.”
양지모(54) 씨는 대청봉은 고사하고 평지를 걷기만 해도 아픈 적이 많았다. 그런데 히말라야라니! 뚜렷한 목표가 그를 이끌었다. 양씨는 아들에게서 간을 이식받았다. 아들은 간을 기증한 뒤에도 결근 한번 하지 않고 거뜬한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생활하다 보니 자주 앓던 몸살도 사라지고 그로 인해 자신감도 덤으로 생겼다.
김준규(48) 씨와 오의숙(48) 씨는 부부 대원이다. 오씨는 간경화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남편 김씨에게 간을 이식해줬다. 김씨는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고 말할 때 발음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히말라야 등정 준비를 시작하면서 생활습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내 오씨의 이야기다.
“남편은 휴일에도 거의 집에만 있었는데, 등산을 시작한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없어요.(웃음) 생활습관이 싹 바뀌니 얼마나 건강해졌는지 몰라요.”
남편 김씨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거든다.
“가는 거지, 정상. 투자를 많이 했으니까.”
아일랜드 피크는 사방이 빙하로 둘러싸여 ‘얼음 바다 속의 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터넷에서 히말라야를 찾아보면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오씨의 관심을 끄는 것은 등반 도중 만나게 될 아름다운 광경이다.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다고 해요.”
지정혁(22) 씨와 어머니 고광례(50) 씨는 모자 대원이다. 아들 지씨는 선천성 신장병으로 세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신장을 이식받고서야 건강을 되찾았다. “함께 훈련하면서 엄마가 힘들어하면 좀 챙기겠는데, 남자들보다 더 잘하는 걸 보니 별로 안 도와주게 돼요.(웃음) 하지만 주변에서 엄마가 잘한다는 말을 들을 때는 정말 좋죠.” 민경배(50) 씨도 처남 김광식(39) 씨와 함께 히말라야에 도전한다. 김씨는 “매형도 형 아닙니까”라며 기증을 자처했다. 민씨는 겨우 건강을 회복했는데 이번 등반으로 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참가를 망설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보다 수술 상처가 더 큰 고마운 처남과 ‘함께’ 히말라야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에 열심히 훈련하고 있다.
완전히 달라진 건강 생활습관
지체장애가 있는 권혁준(44) 씨는 수술을 통해 새 생명을 얻었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일도, 더 나쁜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일랜드 피크 등정에 성공해 ‘나 자신 속에 지체장애는 없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정흥영(46) 씨는 요즘 시간만 나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대청봉에 오르니 손가락이 부어 반지 낀 손이 아프던데, 아일랜드 피크에 오를 때는 반지를 빼고 가야겠다. 고산증은 어떻게 올까? 고산증이 올 때는 이끌어주는 분들에게 분명히 말해야 한다는데….
만일 그 순간이 되면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이 나지 않을까? 그 순간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모쪼록 노력하는 만큼 여건이 따라줘서 성공했으면 좋겠다!’
이번 히말라야 원정은 박영석 대장이 이끈다. 박 대장은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세계 최단 기간인 8년2개월 만에 등정했다. 세계 최초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최다 등정(6개봉)과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예방접종·고소병 예방 등 만반의 준비
고산지대로 갈수록 평소 신체의 취약했던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장기 이식자들은 이식 후 거부반응을 없애기 위해 억제제를 복용한다. 면역기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어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여러 감염에 대비해 예방접종도 해야 한다. 또한 병마와 오래 싸워오는 동안 약간의 신체장애도 안게 된다. 그래서 육체적 시련과 고소병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3년 전 프랑스의 간이식 환자 6명이 아프리카 킬리만자로(해발 5895m)를 등반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식자들이 고산지대에서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아직 부족하다.
이식자 중에는 신장기능이 저하된 경우가 많은데, 고산지대에서는 신장기능이 더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탈수 방지 및 신장기능 유지를 위한 약제가 필수다. 의료진들은 원정대 대원의 신체 활력지수를 측정하고, 추후 혈액검사를 위한 혈액채취도 실시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 등반에 심전도 기계와 혈중산소포화도 측정기계를 가져가고, 혈액채취 보관을 위한 원심분리기와 질소탱크 등도 운반해갈 계획이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 그럼에도 새롭게 얻은 생명으로 그들은 신의 영역인 히말라야에서 다시 태어나고자 용기를 냈다.
“건강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의 소중함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해요. 당장 뒷산으로 올라가 낙엽 밟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건강이 주는 행복은 당신의 행복에 그냥 더하기가 아닌곱하기가 된답니다.”(오의숙 대원)
권혁준 대원
원정대는 서울대병원 간이식팀과 제약회사 한국노바티스의 후원으로 출범했다. 40여 명의 지원자를 모집한 뒤 트레이닝과 의료검진을 거쳐 최종 대원 10명을 선발했다. 이들은 지난 9월부터 매주 토요일 서울 북한산과 도봉산을 교대로 오르고 암벽등반 연습을 하는 등 체계적인 훈련을 이어오고 있다. 설악산은 마무리 훈련 코스.
9월부터 매주 체계적 연습
“처음엔 힘들었는데, 정상에 올라서서 구름에 덮인 도시를 봤을 때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지정혁 대원)
김상돈 대원
이날 거뜬히 대청봉에 오른 김상돈(47) 씨는 2002년 간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아내가 간을 기증하고자 했지만 그와 혈액형이 달라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받겠다고 신청한 후 3년간 두통 등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수술을 무작정 기다렸다. 운동 삼아 잠깐 산책하고 돌아와 코피를 터뜨리는 환우들을 바라보는 일도 그에겐 견디기 힘든 슬픔이었다.
생과 사를 오가던 어느 날, 그는 한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받을 수 있었다. 한두 달만 늦었어도 몸이 쇠약해져 수술조차 받을 수 없었던 그이기에 더욱 감사한 일이었다. 그는 이번 ‘히말라야 생명나눔 프로젝트’로 더 많은 사람들이 장기기증에 관심을 갖길 간절히 원하며 산을 올랐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났다.
김준규(왼쪽), 오의숙 대원
양지모(54) 씨는 대청봉은 고사하고 평지를 걷기만 해도 아픈 적이 많았다. 그런데 히말라야라니! 뚜렷한 목표가 그를 이끌었다. 양씨는 아들에게서 간을 이식받았다. 아들은 간을 기증한 뒤에도 결근 한번 하지 않고 거뜬한 모습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생활하다 보니 자주 앓던 몸살도 사라지고 그로 인해 자신감도 덤으로 생겼다.
김준규(48) 씨와 오의숙(48) 씨는 부부 대원이다. 오씨는 간경화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남편 김씨에게 간을 이식해줬다. 김씨는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고 말할 때 발음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만 보냈다. 하지만 히말라야 등정 준비를 시작하면서 생활습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내 오씨의 이야기다.
양지모 대원
남편 김씨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거든다.
“가는 거지, 정상. 투자를 많이 했으니까.”
아일랜드 피크는 사방이 빙하로 둘러싸여 ‘얼음 바다 속의 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터넷에서 히말라야를 찾아보면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오씨의 관심을 끄는 것은 등반 도중 만나게 될 아름다운 광경이다.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다고 해요.”
고광례(왼쪽), 지정혁 대원
완전히 달라진 건강 생활습관
지체장애가 있는 권혁준(44) 씨는 수술을 통해 새 생명을 얻었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일도, 더 나쁜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일랜드 피크 등정에 성공해 ‘나 자신 속에 지체장애는 없음’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정흥영(46) 씨는 요즘 시간만 나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대청봉에 오르니 손가락이 부어 반지 낀 손이 아프던데, 아일랜드 피크에 오를 때는 반지를 빼고 가야겠다. 고산증은 어떻게 올까? 고산증이 올 때는 이끌어주는 분들에게 분명히 말해야 한다는데….
정흥영 대원
이번 히말라야 원정은 박영석 대장이 이끈다. 박 대장은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세계 최단 기간인 8년2개월 만에 등정했다. 세계 최초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 최다 등정(6개봉)과 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해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예방접종·고소병 예방 등 만반의 준비
고산지대로 갈수록 평소 신체의 취약했던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장기 이식자들은 이식 후 거부반응을 없애기 위해 억제제를 복용한다. 면역기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어 감염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여러 감염에 대비해 예방접종도 해야 한다. 또한 병마와 오래 싸워오는 동안 약간의 신체장애도 안게 된다. 그래서 육체적 시련과 고소병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3년 전 프랑스의 간이식 환자 6명이 아프리카 킬리만자로(해발 5895m)를 등반한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식자들이 고산지대에서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아직 부족하다.
김광식 대원
결코 쉽지 않은 도전, 그럼에도 새롭게 얻은 생명으로 그들은 신의 영역인 히말라야에서 다시 태어나고자 용기를 냈다.
“건강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건강의 소중함을 진심으로 느끼지 못해요. 당장 뒷산으로 올라가 낙엽 밟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건강이 주는 행복은 당신의 행복에 그냥 더하기가 아닌곱하기가 된답니다.”(오의숙 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