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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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영혼 다친 작은 새 한 마리

사랑에 목말랐던 소년

  • 마야 최 심리상담가 juspeace3000@naver.com

    입력2013-11-25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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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에게 영혼 다친 작은 새 한 마리
    소년이 상담실을 찾아온 것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때였다. 15세 소년티를 벗지 못한, 겉멋이 잔뜩 든 아이였다. 소년의 부모는 전화통화만 했을 뿐 함께 오지 않았다. 소년을 앉게 한 뒤 얼굴을 찬찬히 훑어봤다. 10대들이 보통 갖고 있는 껄렁대는 듯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첫인상은 어른스러웠다.

    “학교생활은 어떠니?”

    “괜찮아요.”

    소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입가에 슬쩍 떠오른 미소가 귀여웠다.

    “친구들과는?”



    “아주 잘 지내는 편이에요.”

    소년은 뽐내는 듯한 목소리로 어깨까지 으쓱하며 대답했다. 소년의 거드름에 나는 ‘풋’ 웃고 말했다. 소년은 기분이 나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예민한 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청소년 내담자가 오면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끄집어내진 않는다. 사실 10대 청소년과 상담해보면 거의 100%라 할 만큼 부모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부모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귀신같은 촉각을 갖고 있어 낯선 상담자를 경계하는 첫 단계에서 부모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 문을 꼭 닫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을 단단히 닫아 놓은 상황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내 질문에 단답식으로 대답하는 상담이 네 차례 지나는 동안에도 소년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소년에게 말 못 할 어떤 상처가 있다는 감을 잡은 것은 소년이 다섯 번째 상담을 오기 전이었다.

    소년은 꽤 부유한 집 아이였는데, 아버지나 어머니 직업은 알 수 없었다. 그때까지 부모에 대한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아이의 취미나 요즘 흥미를 느끼는 것 위주로 대화를 나눴다. 소년은 일상적인 대화엔 능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관심을 가진 역사, 인물, 사회문제나 자잘한 농담 등을 주고받을 때는 진지하면서도 무척 활발하게 이야기했다.

    소년의 학교 성적은 상담에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서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가끔 농담 삼아 소년에게 공부를 잘하지 못할 거라고 놀렸다. 상담 중에 ‘놀리다’라는 것이 생소할 수 있겠지만 ‘농담, 위트, 풍자’는 고도의 상담 기술에 해당한다. 날 때부터 매번 진지한 이야기만 하도록 프로그래밍된 사람의 경우 상담가가 돼서도 농담을 잘하는 내담자를 만나면 단박에 혼선을 빚곤 한다.

    상담은 고도의 집중력과 재빠른 관찰력, 순발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한순간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거나 한눈을 팔면 ‘중요한 실마리’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자 중엔 내담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상담 내용을 전체 녹음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소년이 가족에게 큰 상처를 받은 것은 틀림없었다. 부모와의 관계를 묻지 않아도 대충 그 문제를 가늠할 수 있었다. 소년은 무언가로 인해 마음을 단단히 닫아 놓은 상태였는데, 상담 5회기를 맞았을 때 그의 숨겨진 면을 봤다.

    “인간은 모두 쓸모없고 이기적인 존재예요. 신이 있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모든 인간이 자신의 죄에 합당한 벌을 받아 세계가 정화돼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은 누구에게 들은 거니, 아니면 혼자만의 생각이니?”

    “누구에게 들었냐고요? 그 정도는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이에요. 선생님만 모르는 거죠.”

    소년 얼굴에서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어떤 면에선 소년이 나보다 현실 정보에 빠르고 앞서 있었다. 나는 늘 내 일에 파묻혀 사느라 세상사를 등한시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가장 이기적인 방법으로 사회와 타인의 고통에 등지는 대신, 상담을 업으로 삼아 내 이기심의 죄를 어느 정도 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나는 말없이 소년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소년 얼굴에 분노와 좌절과 고통이 그늘져 있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셔?”

    순식간에 일그러지는 소년의 얼굴을 봤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평소 얼굴로 돌아와 평범하게 대답했다.

    “좋은 분이시죠. 늘 자식 걱정에….”

    나는 내가 너무 앞서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5회기를 마치자 나는 진이 빠졌고, 소년과 나 사이엔 여전히 건널 수 없는 강이 흘렀다.

    상담이 6회기에 이르렀을 때 나는 기력이 다 빠져 있었다. 일종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소년이 상담실 문을 열었을 때도 예전처럼 반갑고 상냥하게 맞을 수가 없었다. 그날은 소년도 말이 없었다. 소년의 부모는 자기 자식인 소년에게 왜 상담이 필요한지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외려 당신이 상담자니 아이를 보낸 이유를 스스로 찾으라는 ‘기막힌’ 말을 남겼을 뿐이다.

    상담 최고의 처방은 사랑

    소년은 사람에게 큰 증오를 갖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정도 많았다. 상담은 사랑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극복한다는 사실을 내담자가 알게 되면 소소히 풀어야 할 이슈가 남아 있어도 상담은 종결된다. 소년은 부모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온전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소년에 대한 내 처방은 결국 사랑이었다. 나는 전에 상담했던 그와 같은 또래의 소녀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진(가명)아, 너랑 비슷한 소녀가 상담을 온 적이 있어. 너를 보면 그 예쁜 소녀가 떠올라. 그 아이가 엄마를 잃은 지 1년 반이 됐을 때였어. 효선(가명)이는 엄마랑 정말 친했거든. 그런데 엄마가 너무 급작스럽게 돌아가신 거야. 효선이는 그 후 늘 착한 딸로 컸어. 그런데 효선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런 착한 딸이 됐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사람은 어른이든 어린이든, 누구나 두 가지 마음을 갖고 있거든. 그런데 너무 한쪽으로 강요당하면 어떻게 되겠니? 스트레스를 엄청 받겠지? 그리고 점점 자신이 위선자라는 생각이 들 거야. 그럼에도 그렇게 행동해왔고 마음을 써왔기에 단박에 바꾸기는 힘들지.

    나는 효선이가 가끔은 친구들 흉을 보고 아빠에게 불평도 하는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나 역시 효선이에게 ‘착한 아이’여야 한다는 것을 은근히 강요했었나 봐. 하루는 효선이가 찾아와서 막 툴툴대며 상담도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고 효선이의 진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어. 효선이는 마침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놨지.

    효선이는 참 밝고 활발한 아이였대. 그런데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었어. 중학교에는 양아치 같은 아이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지. 그런데 효선이가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는 데다 할 말 다하고 고집도 있고 하니까, 그 아이들이 일부러 효선이와 친구들을 떼어놓고 효선이를 ‘왕따’시켰나 봐. 그 아이들이 효선이를 둘러싼 뒤 욕하면서 무릎 꿇고 빌라고 했대.

    효선이는 디자인미술을 공부하는데, 순수미술을 공부하는 아이들도 효선이를 못살게 굴었나 봐.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렇게 밝고 외향적이던 효선이가 내성적으로 변하고 말수도 줄었대. 그래도 효선이에게는 1년 전까지 엄마가 있었잖아. 엄마가 효선이의 친구이자 언니였지.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곤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우울증이 찾아온 거야.”

    처음엔 관심 없는 태도로 무성의하게 듣던 소년이 점점 내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서요?”

    소년이 그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 나를 채근했다.

    “그래서는 뭐…. 상담을 받으러 온 거지. 그래서 내가 효선이의 엄마가 돼주고, 언니도 돼주고, 친구도 돼주려고 해. 나는 나진이의 엄마도 되고 싶고, 누나도 되고 싶고, 또 친구도 되고 싶어.”

    소년이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소년은 그렇게 마음을 열어 갔다. 그리고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든 어느 날, 나는 온전히 소년의 엄마이자 누나이자 친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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