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미셸 여사 부부,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전 국무부 장관 부부(왼쪽부터)가 11월 20일 케네디 전 대통령 묘역을 찾았다.
당시 26세였던 라디오 매니저 피어스 앨먼 씨는 케네디 대통령 도착 장면을 취재하려고 사고 현장 건너편 텍사스교과서 보관창고 앞에 서 있었다. 총 소리가 난 뒤 창고 건물 위를 올려다보니 창문 밖으로 총구가 나와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공중전화 박스를 찾을 때 건물 안에서 검은 머리 남성이 나왔다. 공중전화 위치를 물어보자 그 남성은 “저쪽에 있다”고 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암살범 리 하비 오즈월드였다.
1963년 11월 22일 12시 30분
댈러스 파크랜드 병원의 간호사 필리스 홀 씨는 긴급 후송된 케네디 대통령의 얼굴을 봤다. 얼굴은 파랗게 변했고 총알이 관통한 목에서는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의사들은 오후 1시경 사망 선고를 내렸다. 총탄에 맞은 뒤 30분 만이었다. 재키 여사는 피가 묻은 핑크색 정장 차림으로 침대 발치에 서 있었다. 넋이 나간 듯했다. 사망 선고에도 울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50주년을 계기로 미국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11월 17일 50년 전 현장을 목격한 시민 3명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소개했다. 현장에 있던 이들뿐 아니라, 50년 전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은 대부분 케네디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 순간의 느낌과 장소를 아직 기억한다고 한다. 취임 후 1000일도 안 돼 저격수 총에 맞아 비명횡사한 46세 젊은 대통령. 진보의 화신으로 흑인과 여성으로부터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향수이다. 마치 1979년 한국에 살았던 사람 대부분이 박정희 대통령 피살 당시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케네디 대통령 암살 50주년을 맞아 미국인의 추모 열기는 연초부터 달아올랐다. 5월 2일 미국 텍사스 주 댈러스 시내에 들어선 존 F 케네디 암살 현장 박물관에는 연일 미국과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 수십여 명이 입구부터 줄을 잇는다. 이 박물관 이름은 ‘6층(the sixth floor)’. 50년 전인 1963년 11월 22일 암살범 오즈월드가 텍사스교과서 보관창고이던 건물 6층에서 카퍼레이드 중이던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쏜 역사 현장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케네디 바로 알기 공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오른쪽)의 전 부인 마리나 오즈월드 포터 씨는 오즈월드의 유죄를 믿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50주년을 맞아 현장을 찾은 이들은 박물관 외부에도 많았다. 케네디가 오즈월드의 흉탄을 맞은 도로 위 지점은 흰색 페인트로 ‘×’ 표시가 돼 있다. 관광객은 차들이 없는 틈을 타 이 지점 위를 직접 밟아 보거나 ‘6층’ 박물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앞서 박물관에서 본 저격 당시 영상이 도로 위 ‘×’ 표시와 연동되면서 50년 전 격동의 역사가 생생히 연상되는 듯했다.
추모와 관심 열기는 11월 22일 50번째 기일(忌日)을 앞두고 절정에 이르렀다. 인상적인 것은 미국인이 ‘케네디 바로 알기’ 공부를 통해 젊은 나이에 절명해 신화화된 케네디 대통령의 참모습을 발견하려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언론들은 케네디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신화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을 연일 특집기사로 쏟아냈다.
대표적으로 ‘워싱턴포스트(WP)’는 11월 17일자 특별 섹션에 래리 사바토 버지니아대 정치센터(CFP) 소장의 기고를 통해 미국인이 잘못 알거나 그를 신화화하려고 과장했던 5대 신화(myth)를 소개했다.
먼저 케네디가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를 누른 것은 TV 토론 덕분이라는 고정관념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당시 총 4회 있었던 TV 토론 가운데 케네디가 이긴 것은 1회 토론뿐이었다. 2, 3회 토론은 무승부였고 마지막 외교 분야에선 닉슨이 승리했다.
둘째, 케네디 대통령이 진보의 상징이라는 신화도 잘못이라고 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정부지출 감축, 세금 감면 등을 내세운 경제적 보수주의자인 것은 물론,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불사하는 냉전 스타일의 외교정책으로 후일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행정부의 정책 모델이 됐다. 그해 마틴 루서 킹 목사 등의 ‘워싱턴 행진’으로 촉발된 흑인인권정책도 암살 전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셋째, 케네디 대통령이 인공위성 발사 선수(先手)를 소련에 뺏기자 달 착륙에 최우선 관심을 뒀다는 신화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케네디 대통령은 “왜 돈을 들여 쓸데없이 달에 가야 하느냐”고 불만을 표시했고, 우주개발 분야에서 소련과의 경쟁보다 협력을 원했다는 것이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아들 케네디 주니어가 아버지 책상 밑에 들어가 장난을 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기 한 달 전인 1963년 10월 찍은 사진이다(왼쪽). 대통령 재임 시절 요트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존 F 케네디.
다섯째,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대한 많은 정보가 공개됐다는 믿음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1992년 암살기록수집법이 제정되면서 63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에 대한 미국 중앙정보국(CIA) 정보 100만 건이 아직 기밀 상태로 보관되고 있다.
오바마도 묘지 찾아 헌화와 묵념
사바토 소장의 다섯 번째 지적의 연장선에서 해마다 이맘때면 나오곤 했던 케네디 대통령 암살 음모론도 여전히 고개를 들었다. 특히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은 11월 8일 NBC와의 인터뷰에서 “오즈월드가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데 확실히 의심이 든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다른 누가 연루됐는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미국 정부가) 오즈월드의 행적과 범행 이유를 명확히 밝혀냈는지, 쿠바와 러시아로부터 영향을 받은 건 없는지 의심이 간다”고 말했다.
일반 미국인도 마찬가지다. 11월 15일 갤럽이 미국 성인남녀 103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음모론을 믿는 사람이 여전히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61%가 오즈월드의 단독 범행이 아니고 거대한 배후가 있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단독 범행이라는 응답은 30%에 그쳤다.
신화와 음모론으로 싸인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50주년을 맞아 문화계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각에서 지나친 상업주의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케네디 대통령의 일생을 다룬 전기와 관련 저작물이 가을에만 수십 권씩 서점에 쏟아졌다. ‘WP’가 10월 27일자에 ‘존 F 케네디의 책들’이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리뷰섹션을 내는 등 언론매체 대부분이 ‘케네디 특수’를 전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방송도 각종 특별 기획물을 내놓았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은 11월 21일부터 사흘간 매일 밤 11시에 케네디 대통령 관련 신규 대작 프로그램 3편을 특별 편성, 방송했다. CNN은 17일부터 영화배우 톰 행크스가 제작을 맡아 케네디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를 새롭게 조명한 10부작 다큐멘터리 ‘60년대 : 케네디 전 대통령의 암살’을 방송했다. 워싱턴에 있는 언론박물관인 뉴지엄(Newseum)에서는 케네디 전 대통령 특별기획전이 열렸다.
이런 가운데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미셸 여사 부부,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전 국무부 장관 부부는 11월 20일 오후 버지니아 주 알링턴 국립묘지 내 케네디 묘역을 찾아 묘지 앞에 헌화하고 묵념했다. 묘지 바로 옆에는 1년 365일 꺼지지 않는 ‘불멸의 불꽃(eternal flame)’이 타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