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파탄에 있는 아소카 스투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북탑.
카필라성에서 살던 석가족은 성이 멸망한 뒤 두 군데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 인도 상카시아와 네팔 파탄이 그곳이다. 나는 상카시아에 몇 년 전 가본 적 있고, 지금도 그곳 풍경이 또렷하다. 상카시아에는 석가족이 건립한 불교 사원이 있었다. 석가족 집성촌인 그곳에서 나는 마을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카필라성이 멸망한 것은 코살라왕국 왕의 복수극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석가족 일부가 히말라야 산을 향해 피난을 갔는데, 지금은 파탄에 모여 석가족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석가족의 수난 시대
석가족의 카필라성이 멸망한 이유는 이랬다. 석가족은 부처가 자기 왕국사람이라고 해서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카필라성 부근에는 강대국 코살라왕국이 있었는데, 코살라왕국 파세나디왕 역시 부처를 흠모한 나머지 석가족 출신의 왕비를 맞고 싶어 했다. 그는 카필라성으로 사신을 보내 자신의 의향을 전했고, 카필라성 왕은 강대국 왕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카필라성 왕은 순수한 왕족 혈통의 여성 대신 여종의 딸 바사바카티야를 보냈다.
이런 사정을 몰랐던 파세나디왕은 크게 기뻐하며 바사바카티야를 정비로 맞아들였다. 바사바카티야는 얼마 후 비두다바 태자를 낳았고, 태자는 성장해 생모 고향이자 자신의 외가인 카필라성을 방문했다.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아버린 비두다바는 코살라왕국으로 돌아와 부왕에게 이를 보고했고, 파세나디왕은 분노해 즉시 정비와 태자의 지위를 박탈했다.
이에 태자는 부왕을 살해하고 왕권을 탈취한 뒤 대군을 이끌고 카필라성을 공격했다. 그는 석가족을 연못에 몰아넣고 수장하는 등 잔인하게 학살하며 복수극을 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성을 탈출해 피난을 떠났는데, 그중 일부 후손이 현재도 파탄 지역에 살고 있다고 슈라즈 씨가 설명했다.
독일인 부부를 만난 슈라즈 씨는 파탄에 남겠다고 했다. 나와 지인들은 버스를 타고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이 파탄을 방문하고 그 기념으로 세운 스투파(유골을 매장한 화장묘 건조물)가 있는 장소로 향한다. 파탄에는 아소카 스투파가 동서남북과 중앙에 4기가 있다지만 정확지는 않다. 누구보다 부처를 흠모했던 아소카왕은 파탄 땅을 하사하면서 스투파를 세워 석가족이 대대로 살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리 일행은 물이 말라가는 파탄의 테타(Teta)천을 지나 아소카 스투파 중에서 동탑을 먼저 가본다. 현지인은 동탑을 타이타 투라(Taita Thura)라고 부른다. 생각보다 초라하다. 북적거리는 길옆에 우리의 왕릉 같은 모습으로 스투파가 서 있다. 상단은 보드나트 스투파 같은 형식이다. 하단에 명문이 적힌 검은 표지석이 있는데 아소카왕 시대에 사용했던 팔리어(중세 인도·아리아어의 일종)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아소카 스투파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다시 남탑으로 간다. 현지에서는 라간 투라(Laghan Thura)라고 부른다. 남탑 역시 주택가 사이에 있는데, 입구 쪽에 석가족이 5000루피를 시주해 정화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스투파 4기 모두 자동차로 15분 정도 거리다. 서탑인 풀초 투라(Phulcho Thura)는 파탄의 문(門)에서 가깝다. 역시 입구에 시주자 명단이 보이고 네팔 연대가 명기돼 있다. 네팔 연대가 서기보다 97년 빠른 것이 특이하다. 한갓진 장소인지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북탑은 바그마티 강 옆에 있는데 이바히 투라(Evahi Thura)라고 한다. 스투파 4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잘 관리되는 듯 깨끗하다.
나는 아소카왕을 소재로 소설을 구상 중인데, 그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지인들에게 아소카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소카왕과 우리의 인연
아소카 시대 문자인 팔리어가 새겨진 동탑 표지석(위)과 관리인이 지키는 남탑.
아소카왕은 우리 역사와도 관계가 깊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이니까 4세기 후반이므로, 기원전 3세기에 활동한 아소카왕은 우리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왕들이 하나같이 아소카왕을 모델로 삼고 싶어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소카왕의 그림자가 우리 불교사에도 드리워져 있는데 ‘삼국유사’ 탑상편 ‘황룡사 장육존상’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553) 2월 대궐을 용궁 남쪽에 지으려는데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이에 절로 삼고 황룡사라 했다. (중략) 얼마 후 바다 남쪽에서 큰 배 한 척이 떠와서 하곡현 사포(현 울산 울주군 곡포)에 닿았다. 배를 검사해보니 공문이 있었다. 인도 아육왕(아소카왕)이 황철 5만7000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석가의 불상 셋을 주조하려다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인연이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을 이뤄달라’고 축원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인도 불교가 신라로 들어왔다는 점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이지만, 진흥왕은 아소카왕을 자신이 닮고 싶은 제왕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구려 광개토 대왕도 아소카왕을 흠모했던 것 같다. ‘삼국유사’ 탑상편 ‘요동성 육왕탑’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니 그렇다. 여기서 육왕(育王)이란 아육왕을 줄인 말이다. 광개토 대왕이 요동성을 정복한 뒤 신하들과 순행하다 아소카왕이 세운 불탑 자리를 발견하고는 신앙심이 생겨 칠중목탑(七重木塔)을 세웠다는 내용이다. 백제 성왕도 마찬가지다. 성왕이란 전륜성왕의 줄임말이다. 인도 신화에서 전륜성왕은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하고 통치하는 이상적인 군주를 말하는데, 세속에선 아소카왕을 그렇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