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드마 삼바바가 수행했던 신비로운 탁상 사원.
“어디서 왔습니까.”
“파로 탁상 사원에서 시작했죠. 푸나카종까지 오체투지로 가고 있습니다. 길 위에서 3개월째입니다.”
“푸나카종까지 가는 것이 목표입니까.”
“아닙니다. 4개월 정도 더 할 겁니다. 푸나카종에서 동부 부탄으로 갈 계획이니까요.”
“위험하지 않습니까.”
“가족이 허락했어요. 그러니 내 몸이 어찌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왜 이런 고행을 합니까.”
“고행이 아니라 기도죠. 가족이 잘되기를 바라고, 다음 생에는 부처님 세상에서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기도를 합니다.”
우리 일행이 내일 가려는 파로 탁상 사원에서 시작했다고 하니 말문이 막힌다. 파로에서 팀푸를 거쳐 부탄의 대표적인 고개인 도추라를 3개월 동안 오체투지를 하며 넘어왔다는 얘기다. 그것도 나와 같은 61세 몸이라고 하니, 정신력이 육체를 마음대로 다스리는 경지다.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춤
개 한 마리가 반가운 듯 살랑살랑 꼬리를 친다. 집에서 데려온 개가 아니라고 한다. 부탄에는 떠돌이 개가 많지만 병들어 죽는 개는 많지 않다고 한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동물건강센터에서 떠돌이 개의 건강까지 관리하기 때문이다. 먹이는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준다고 하니 개들도 복지혜택을 누리는 셈이다.
팀푸로 돌아오니 정부종합청사가 자리한 팀푸종에서 국기 하강식을 하고 있다. 수도를 팀푸로 천도하면서 새로 지은 종(dzong·사원과 사법부가 같이 있는 행정청사)이다. 팀푸종이 세계 관광객에게 유명해진 이유는 부탄 축제인 테추(Tshechu) 때문이다. 테추는 일종의 가면축제로 봄에는 파로종에서, 가을에는 팀푸종에서 파드마 삼바바에 얽힌 12가지 전설 같은 이야기를 춤으로 만들어 공연하는 축제다. 테추가 열리는 사흘간은 공휴일이다. 국왕 생일 때는 이틀간 공휴일이고, 첫눈이 오는 날도 공휴일이 된다고 하니 진정 휴일을 즐기는 나라 같다. 공무원도 9시까지 출근해 오후 5시면 칼같이 퇴근하며 토·일요일은 당연히 휴무다. 부탄처럼 쉴 줄 아는 나라도 없을 듯하다.
2 팀푸종 국기 하강식. 3 부탄 최초로 건립된 키추라캉 사원.
일행은 캄캄한 시각에 파로에 도착해 피곤한데도 이구동성으로 테추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친리 씨가 테추 무용수 몇 명을 수소문해 불러보겠다고 약속한다. 저녁식사를 느긋하게 마치고 나니 숙소 간이극장에 그들이 와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인간문화재는 아니고 전수생들인 것 같다. 남녀 모두 앳돼 보인다. 마룻바닥에 땀을 떨어뜨리며 최선을 다해 공연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자식 같은 생각에 측은한 기분이 든다.
그들이 한 공연은 동물이나 지신, 영웅이 등장해 선신이 악신을 무찌르는 이야기다. 원색의 무용복을 입고 가면을 쓴 채 빙빙 도는 것이 춤의 특징이다. 부탄 지방마다 독특한 춤이 있는데, 이는 산악지역의 삶이 그만큼 힘들고 고단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춤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친리 씨가 설명했다.
잠자리에 들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어지럽게 빙빙 도는 그들의 춤이 아니라, 그들이 신고 있던 신발이다. 버선코가 달린 신발 모양이 우리 것과 닮았던 것이다. 부탄 신발에 왜 버선코가 달린 것일까. 그러고 보니 부탄 남자들이 입는 ‘고우(Gou)’라는 전통의상도 고구려 벽화 속 수렵하는 남자 복장과 흡사하다. 태극 문양을 식당에서 본 것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부탄어와 우리말에 비슷한 단어가 있는지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할 시간이다.
승합차를 타고 탁상 사원으로 이동하는 동안 친리 씨가 일행 중에서 말을 탈 사람을 모집한다. 산행에 자신 없는 몇 사람이 응한다. 말은 중간 지점까지만 간다는데, 나는 땀을 쏟아 몸무게를 좀 줄이고 싶어 걷기로 한다. 탁상은 ‘호랑이 보금자리’라는 뜻이다. 그만큼 신비롭고 위엄 있는 장소인데, 전설적 고승 파드마 삼바바가 수행하려고 탁상에 도착하자마자 용, 사자, 호랑이 등이 나타나 환희의 춤을 췄다고 전해진다.
탁상 사원 초입에서 나는 말을 타는 사람들과 헤어져 산행을 시작한다. 친리 씨와 승합차 기사인 다지 씨가 지팡이를 건네며 동행해준다. 29세인 다지 씨가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를 안다니 신기하다. 부탄에서도 우리나라 음악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을 재방송하는 모양이다. 부탄어를 물어보니 내 예감이 들어맞는다. 엄마, 아빠는 우리말과 같고 심지어 전라도 사투리도 있다. 아주머니를 전라도에서는 ‘아짐’이라고 부르는데 부탄에서도 그렇다. 손바닥을 오므리는 주먹도 ‘주모’라고 하니 비슷하다.
부탄 제일 성지의 노인
키추랑카 사원 입구에서 마니차를 돌리는 돌제 노인.
탁상 사원 안은 향연기로 자욱하고 스르르 졸음이 올 정도로 심신이 편안하다. 일행 대부분은 지독한 향냄새 때문에 몇 분 만에 참배만 하고 사원을 나온다. 창을 통해 돌아갈 곳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부탄 최초의 절이라는 키추라캉 사원도 저 멀리 보인다.
우리 일행은 키추라캉 사원에 들러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지붕을 금칠한 왕실사원이라 번쩍거린다. 그러나 탁상 사원에서 내려와 가까이서 보니 시골의 작은 사원처럼 초라하다. 그래도 키추라캉 사원에 들르지 않았더라면 후회했을 것 같다. 키추라캉 사원에 있는 오래된 불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원 입구에서 마니차를 돌리는 82세 돌제 노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노인은 어떤 고승보다도 내게 사람 향기를 줬다. 이가 많이 빠진 노인은 잇몸을 드러내며 말했다.
“나는 늙어서 (나에게) 일을 안 시키니 좋아요. 사원 앞에서 날마다 마니차를 돌릴 수 있으니 좋아요. 머지않아 죽으면 파드마 삼바바님을 만나 천상에서 살 수 있으니 좋아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을 보내는, 이처럼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 노인은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벗어버린 생불 같은 모습이다.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행 모두가 환희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말끝마다 “좋아요”를 반복하는 노인의 소박한 이야기는 어떤 선사의 법문보다 울림이 컸다. 노인의 이야기는 부탄을 여행한 내게 가장 큰 선물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