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30일 미국 메사추세츠 주 케이프 코드 해안에 떠밀려온 고래들. 이틀간 이 해안에서 45마리의 고래가 ‘자살’했다.
5m 정도의 어린 고래 한 마리가 해안에 떠밀려와 있었다. 배 부분이 모랫벌에 걸린 고래는 꼬리를 연신 흔들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침 썰물 때라 파도는 점차 뒤로 밀려가는 중이었다. 발콤과 아내 다이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은 다급히 행동에 착수했다. 고래의 머리 부분을 바다 쪽으로 돌리고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조금씩 고래를 물 쪽으로 밀어붙였다. 조금만 바다 쪽으로 헤엄쳐 가면 이 고래가 떨어져 나온 무리들이 있을 것이다.
일순간 고래는 바다로 헤엄쳐 갈 듯했다. 그러나 소용 없었다. 아무리 밀어내도 고래는 버둥거리며 해안으로 되돌아왔다. 결국 발콤 일행은 죽어가는 고래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자살’이었다.
그때 인근의 어부 한 사람이 발콤에게 뛰어왔다. 2km쯤 떨어진 해안에서 또 다른 고래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은 힘을 합쳐 해안가에 보트와 카약으로 ‘벽’을 쌓기로 했다. 고래가 아예 뭍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날 바하마 해안가에는 14마리의 고래가 떠밀려왔다. 이중 일곱 마리가 죽었다. 밍크고래 두 마리에 점박이 돌고래 한 마리 등 자살한 고래의 종류도 다양했다.
고래의 자살은 비단 바하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코르시카, 그리스, 캘리포니아, 북아프리카 등 고래가 서식하고 있는 해안가라면 어디서나 고래의 자살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왜 고래는 이처럼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고래의 자살은 무리에서 떨어져 방향감각을 잃은 탓이라고 여겨져왔다. 그러나 켄 발콤은 고래의 자살에 대해 새로운 가설을 내놓았다. 바닷속의 소음이 날로 더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방향감각 잃은 탓
발콤의 주장은 해양생물학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최신호의 기사에 따르면 ‘소음이 고래의 자살을 불러온다’는 가설은 꽤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하루에만 14마리의 고래가 떠밀려온 바하마 해안가에는 미 해군의 수중음파 탐지기가 강력한 음파를 내보내고 있다. 또 카나리 제도에서 고래의 집단자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근처에서는 58대의 군함과 6대의 잠수함이 참가한 연합국의 해군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하마의 바닷속에서 군함들이 내는 소음은 대략 235dB(데시벨) 정도. 지진에 버금가는 소음이다.
14마리의 고래가 집단자살을 감행한 날, 발콤은 워싱턴 해군 연구소에서 해양생물학을 연구하는 봅 기시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시너는 자살한 고래의 머리 부분을 절단해 해부해보자고 제의했다. 해부 결과 고래의 귀 주위에 상처가 나 있었고 이 때문에 뇌출혈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발콤의 연구팀은 이 상처가 ‘강력하고 다중적인 바닷속 소음’ 때문일 것으로 추정했다. 고래는 소음을 견디지 못해 뭍으로 떠밀려왔고, 결국 강렬한 햇빛에 피부가 타고 심장혈관이 파열되어 사망했다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가설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연구소의 찰리 포터 연구원은 보다 신중한 입장이다. “바닷속 소음이 바다생물의 생존에 치명적이라면 작은 물고기부터 고래까지 모두 해안가로 떠밀려와 자살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는 묻는다. 하버드 의대의 달레인 케튼 연구원은 자살한 고래의 머리 부분을 3차원 단층촬영을 했다. 소음 때문에 고래가 죽을 정도였다면 당연히 고막이 터져 있을 거라고 그는 예상했다. 그러나 고래의 고막은 멀쩡했다.
잠수함, 군함, 유조선, 쇄빙선(왼쪽부터) 등이 바닷속에서 일으키는 소음은 40년 동안 10배나 늘었다. 이 때문에 고래의 청력도 10분의 1로 떨어졌다.
소음에 고래 청력 10분의 1로 떨어져
1997년부터 1년간 미 해군은 캘리포니아 해안부터 하와이까지 광범위한 해역에서 수중 음파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 해역에는 흰긴수염고래부터 돌고래까지, 여러 종류의 고래가 살고 있다. 미 해군은 120dB 정도의 소음을 바닷속에 퍼뜨렸다. 이는 해양학자들이 ‘고래의 신경을 건드리는 정도’라고 규정한 소음이다. 하지만 고래들은 평온하게 바닷속을 헤엄칠 뿐이었다.
그러나 고래 연구가들은 고래가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는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음역에 있다고 말한다. 즉 고래가 평소 내는 소리와 비슷한 저주파의 소리는 별 문제가 없지만 잠수함이나 배가 바닷속에서 내는 소리는 고래가 낼 수 없는 높은 소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고래는 낯선 소리에 놀라면 바닷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대신 수면으로 떠오른다고 한다.
해안에 주둔하고 있는 군함과 잠수함들이 고래의 바닷속 진로를 방해하기 때문에 고래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주장도 있다. 해군은 보통 해안에서 2km 정도 떨어진 연안에 정박하는데, 바로 이 지점이 고래가 평소 지나다니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 길에서 군함들이 180dB 정도의 소음을 내면 고래는 자신의 길을 벗어난다. 하지만 군함이 해안에서 5km 정도 떨어져 똑같은 소음을 내면 고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코넬대학 생물음향연구소의 크리스토퍼 클락 연구원은 “바닷속 소음이 고래에게 ‘죽음의 종소리’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래의 행태와 바닷속 소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대부분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군함과 잠수함만 바닷속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유조선, 쇄빙선, 예인선 등 각종 선박들의 엔진이 내는 소음은 40년 전의 10배에 달한다. 이 같은 ‘소리 공해’ 때문에 1600km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던 고래의 청력은 최근 10분의 1로 떨어졌다.
캐나다 연안에서 유정 탐사가 시작된 뒤 이 인근에 자주 나타나던 흰긴수염고래의 모습이 사라졌다. 클락 연구원은 자조적으로 묻는다. “11초 간격으로 쿠~웅 쿠~웅 하는 소리가 24시간 내내 반복되고 있다. 사람이든 고래든 이런 상황을 배겨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