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심 고리키(1868~ 1936).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부인 그는 부드베르그와 12년간 내연관계를 유지했다.
영국 첩보기관인 MI5가 최근 ‘20세기의 가장 비밀스런 여인’으로 불리는 마리야 부드베르그(1892∼1974)에 관한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무라’라는 애칭으로 20세기 초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의 삶이 또다시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이다.
러시아 귀족의 딸로 영국에서 공부한 부드베르그는 런던과 모스크바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에서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던 여인이었다. 빼어난 미모에 지적인 매력까지 갖춘 그는 각국의 예술가와 정치인, 지식인들과 친분을 나눴다. 그러나 이런 화려함 뒤에는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등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감당하기 힘든 불행을 겪어야 했던 비극적인 삶이 있었다.
MI5를 비롯한 서방의 첩보기관들은 한때 그를 소련의 스파이로 여기고 오랫동안 감시했다. 이 매력적인 여성이 구소련 비밀경찰이며 KGB의 전신인 국가정치부(GPU)와 연계돼 서방의 동향을 소련측에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부드베르그는 1920년대 이탈리아와 독일, 에스토니아 등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어서 그가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라는 주장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간첩 혐의설’과 함께 부드베르그를 따라다닌 것은 숱한 염문이다. 당대를 주름잡았던 세 사람의 유명인사가 이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어머니’ ‘나의 대학’ ‘밤 주막’ 등의 작품으로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작가 막심 고리키,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 등의 공상과학소설을 썼던 영국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 그리고 영국의 전설적인 첩보원 로버트 브루스 로커트경이 바로 그의 남자들이었다. 부드베르그는 두 번 결혼했고 늘 많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몇 권의 장편소설을 합쳐놓은 것처럼’ 극적인 삶의 중심에는 이 세 남자가 있었다.
고리키·웰스 등 숱한 염문 뿌려
부드베르그는 19세 때 러시아 외교관이었던 벤켄도르프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영국과 독일에서 살았다. 1차 대전이 터지자 가족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왔지만 곧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혼란중에 남편은 살해되었고 아이들과도 생이별을 했다.
그는 급박한 상황에서 에스토니아 귀족인 부드베르그 남작과 결혼했지만 며칠 만에 헤어졌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언제라도 러시아를 탈출할 수 있도록 외국 국적을 얻기 위해 감행한 결혼이었다. 그러나 부드베르그 남작 부인이라는 이름만은 평생 간직했다.
그 후 부드베르그는 전쟁과 혁명의 광풍 속에서 영국 외교관 로커트를 만났다. 로커트는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한 ‘007’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영국 대사관의 통역 일자리를 구한 부드베르그는 소련으로 부임한 지 3일 된 로커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열정에 휩싸인 두 사람은 그 삼엄하던 시절 모스크바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 근처에 살림을 차리는 모험을 했지만 소련 당국의 감시망을 피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간첩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 부드베르그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당시 혁명재판소장이던 야코프 페테르스를 유혹했다. 덕분에 로커트는 풀려났으나 즉시 소련에서 추방돼 두 사람은 헤어져야 했다. 그러나 훗날 두 사람은 재회했고 한때의 사랑은 평생의 우정으로 이어졌다.
로커트를 떠나보낸 부드베르그는 고리키의 개인비서가 된다. 고리키는 소련정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고리키의 우산 속에서는 안전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하며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리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이후 12년 동안 사실상의 부부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소련 내부에서 이들의 관계는 비밀이었다. 소비에트 문학의 대부와 두 번이나 결혼한 경력이 있는 귀족의 딸의 내연관계는 밝혀지지 않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고리키는 부드베르그를 ‘강철 같은 여인’이라고 부르며 애정을 쏟았고 유작이 된 미완성 서사시 ‘클림 사므긴의 생애’도 그에게서 영감을 받아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드베르그는 고리키의 소개로 이오세프, 스탈린 등 소련 지도자들과도 인사를 나눴고 자유롭게 서방과 소련을 드나들었다.
고리키(가운데)와 부드베르그(오른쪽)가 함께 찍은 사진.‘타임머신’의 작가 조지 웰스. 웰스는 부드베르그와 상징적인 결혼식을 올렸다.1934년의 작가대회에 참가한 구소련의 작가들. 앞줄 가운데가 고리키다.(왼쪽부터)
고리키가 귀국했을 당시 소련에는 스탈린이 주도하는 대숙청의 광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스탈린은 노작가를 귀찮아하고 홀대했다. 이 때문인지 건강이 악화된 고리키는 36년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폐렴이라는 공식 발표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됐다. 어쨌든 말년의 고리키는 편지로 사랑을 이어가면서 늘 부드베르그를 그리워하다가 쓸쓸히 최후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러 “진실 밝히기는 충분치 않다”
고리키와 헤어진 뒤 첫 결혼에서 얻은 아들, 딸과 함께 33년 영국으로 온 부드베르그는 또 다른 사랑을 만난다. 고리키의 오랜 친구였던 웰스였다. 웰스는 20년 고리키의 초대로 소련을 방문했다가 부드베르그를 알게 됐다. 웰스는 첫눈에 부드베르그에게 반했으나 친구의 애인이라 속만 태웠다.
그러다가 부드베르그가 영국으로 오자 웰스는 정열적인 구애 끝에 사랑을 얻었다. 70대의 할아버지 웰스는 딸 같은 부드베르그에게 흠뻑 빠졌다. 심지어는 부드베르그와의 성생활에 대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주변에 털어놓아 친구인 극작가 버나드 쇼나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등으로부터 “주책없다”는 놀림을 받았다. 그러나 부드베르그는 결혼은 물론 동거도 거부해 웰스의 속을 태웠다. 두 사람은 런던 소호에 있는 ‘쿼바디스’라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상징적인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국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고 46년 웰스가 죽을 때까지 애인 관계를 유지했다. 부드베르그는 웰스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아 비교적 평온하고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74년 아들이 사는 이탈리아에 갔다가 세상을 떠난 부드베르그는 영국으로 옮겨져 묻혔다. 장례식에 각국 대사 등 유명인사들이 참석해 다시 한번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 후 딸인 타냐 알렉산더가 어머니에 대해 쓴 회고록을 비롯해 러시아와 서방에서 부드베르그에 대한 책들이 나왔고 95년에는 다큐멘터리도 제작됐다. 부드베르그가 정말 소련의 스파이였는지, 또 혁명 후 공산주의자가 됐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엇갈린다. 블라디미르 바라호프 고리키 기념관장 등 러시아의 고리키 전문가들은 “이번에 공개된 영국의 비밀문서는 진실을 밝히기에는 충분치 않다”고 반박했다. 러시아 언론인인 알렉산드르 주브코프는 “오히려 당시 소련 당국은 그가 영국의 스파이가 아닌가 의심했고 혁명 후 프랑스로 망명한 러시아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그가 독일을 위해 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설명했다. 딸인 알렉산더는 99년 출판된 회고록에서 “엄마를 둘러싼 숱한 추문들 때문에 온갖 시련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키려고 했던 한 여성의 모습은 가려져왔다”고 안타까워했다. 결국 부드베르그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좀더 시간이 필요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