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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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같은 ‘아이들 세상’ 에 어른들 깜짝!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3-01-09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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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술 같은 ‘아이들 세상’ 에 어른들 깜짝!

    간호사의 손가락을 꼭 잡고 공중에 매달린 아기(큰 사진). 갓난아기는 엄마의 젖냄새와 다른 산모의 젖냄새를 구분한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갓난아기가 간호사의 엄지손가락 두 개를 양손으로 꼭 잡고 있다. 그 상태에서 간호사가 두 팔을 들어올리자 아기는 손을 놓지 않고 간호사에게 대롱대롱 매달린다. 마치 철봉에 매달린 아이처럼 흔들거리며 매달려 있는 아기 너머로 간호사의 놀란 눈이 클로즈업된다.

    EBS의 다큐멘터리 ‘아기 성장 보고서’에 나오는 마술 같은 장면은 이뿐만이 아니다. 생후 5일 된 아기가 거즈에 묻힌 두 개의 모유 중 ‘엄마 젖’을 향해 매번 정확하게 고개를 돌리고 오른발 왼발을 교대로 내딛으며 걸음마를 흉내낸다. 3개월 된 아기가 1+1은 2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엄마’란 말도 간신히 하는 14개월짜리 아기는 주어와 목적어까지 구분해낸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과학자인 데다가 언어에 대한 선천적인 감각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2월30일부터 1월3일까지 EBS에서 방송된 5부작 다큐멘터리 ‘아기 성장 보고서’는 탄생부터 생후 36개월까지 아기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작 기간은 무려 1년5개월, 공동연출자인 류재호 PD와 유규오 PD는 이 프로그램 제작에 30분짜리 테이프 570개와 1시간 분량인 6mm 테이프 60개를 썼다. 기존 5부작 다큐멘터리 촬영분의 서너 배 가량을 촬영한 셈이다. 그러나 그만큼 들인 공은 화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시청자 반응 폭발적 … 재방영 검토

    “‘아기 성장 보고서’는 ‘어떻게 우리 아기를 똑똑하게 만들까’가 아니라 ‘아기라는 존재를 한번 이해해보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말 못하는 아기지만 아기가 대체 무얼 생각하는지, 무얼 원하고 이해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류재호 PD의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이를 낳는 일조차 회의적이었다는 류PD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절로 아기에 대한 사랑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고. 40명이 넘는 프로그램 속의 아기들 중에는 이제 21개월이 된 류PD의 딸 예나도 속해 있다.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항상 의도대로 되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섭외한 아기의 실험이 잘 진행되지 않으면 다급하게 우리 딸아이를 데려다가 다시 촬영했어요.”



    ‘아기 성장 보고서’에는 출산부터 갓난아기, 막 뒤집기를 하는 아기, 기는 아기, 걷는 아기 등 성장과정에 있는 숱한 아기들이 등장한다. 이 아기들은 제작 초기 단계였던 2001년 10월에 공모를 통해 모았다. 편집 과정중에 잘려나간 화면 속에 있는 아기들까지 합하면 100여명의 아기가 카메라에 담겼다.

    그러나 아기를 촬영하는 일은 그야말로 ‘자연 다큐멘터리와 똑같은’ 작업이었다. 연출이나 지시를 전혀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막상 촬영하러 가면 아기가 잠들어버려 하염없이 자는 아기 얼굴만 바라보다 되돌아온 일도 비일비재였다. 아직 미혼인 유규오 PD는 “그러면서 아기들이 얼마나 예쁘고 생명력 넘치는 존재인지 알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려 겨우 한 장면 촬영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제작 기간도 덩달아 늘어났다. 지난해 6월 EBS 공사 창립 1주년을 기념해 방송하려 했던 애초의 계획도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1월1일에 방영된 3부 ‘애착’ 편에 대한 시청자의 반응은 특히 뜨거웠다. 이 프로그램은 태어난 후 만 1년 동안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기가 커서도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자신감 있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음을 실험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아기가 울 때마다 엄마가 얼른 달려가 안아주고 불편한 부분을 모두 해결해준 ‘안정애착’ 아기는 유치원, 초등학교에서도 리더로 클 확률이 높다. 태어나 처음 맺은 대인관계인 엄마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엄마가 아기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 ‘불안정 애착’의 정서를 가지게 된 아기는 사회성이 부족하고 발달이 늦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으로 뇌세포의 형성이 늦어져 후천적 자폐아가 될 가능성까지 있다.

    마술 같은 ‘아이들 세상’ 에 어른들 깜짝!

    아기는 높이에 대한 감각이 있을까? 막 기기 시작한 아기는 높이를 지각하지 못하고 투명한 유리판 위를 기어온다(맨 왼쪽). 그러나 기어다닌 지 1개월이 된 아기는 유리판 앞에서 멈춘다. ‘높은 곳은 위험하다’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왼쪽에서 두 번째).엄마의 젖이 묻은 거즈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혀를 내미는 생후 5일 된 아기.류재호 PD(왼쪽)와 유규오 PD(오른쪽).

    3부 방송이 나간 다음날 EBS의 게시판에는 시청자들의 글이 빗발쳤다. ‘아가야, 미안해’라는 글을 쓴 한 직장여성은 ‘직장에 나가기 때문에 4개월 반 되는 아기를 아줌마에게 맡기고 있다. ‘자꾸 안아주면 버릇 된다’는 아줌마의 말대로 울어도 잘 안아주지 않았는데 아기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썼다.

    “사실 ‘애착’ 편을 촬영하면서 제 자신도 ‘내 아기는 안정 애착 아기일까’ 하는 불안감이 생기더라고요. 프로이트는 부모와 처음 맺은 인간관계가 그 후 일생의 대인관계를 결정짓는다고 말했습니다.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도 결국은 하나의 인간관계니까요.” 류PD는 방송 후의 반향이 염려되어 ‘애착’편은 편집 과정중에 프로그램의 수위를 많이 조절했다고 털어놓았다. 방송 되지 않은 부분 중에는 ‘애착관계는 대물림된다’는 내용, 즉 안정적인 애착관계 속에서 자라난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제대로 사랑할 줄 안다는 내용도 있다. 정신과 의사인 강북삼성병원의 노경선 박사는 “이 프로그램을 강의 교재로 쓰겠다”고도 말했다고.

    “흔히 ‘애 버릇 나빠진다’면서 우는 아이를 방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준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만큼 불안정한 애착관계를 갖게 됩니다. 최소한 1년6개월까지는 아이를 많이 안아주고 대화도 자주 해주세요.” 어느새 ‘육아전문가’가 된 류PD의 당부다.

    이외에도 아이의 인지와 언어습득 과정,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에 따른 육아방법 등 부모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사실들을 풍부한 자료로 보여주는 ‘아기 성장 보고서’를 보면 우리 부모들은 너무도 기본적인 것들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아기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사실이다. 영재나 신동으로 만들기 위해 뭔가를 자꾸 가르치려 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아이의 뺨에 얼굴을 비비며 “엄마는 널 정말 사랑해”라고 말해주자. 아기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여러 가지 능력들은 ‘얼마나 빨리, 많이 가르치나’가 아니라 ‘얼마나 부모가 관심과 사랑을 쏟느냐’에 따라 발현되기 때문이다.

    ‘아기 성장 보고서’는 연말연시 밤 시간에 방송된 악조건 속에서도 4%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EBS 시청률로는 경이적인 수준. 또 한 번 보고 싶다는 시청자들의 요구가 거듭되는 바람에 EBS측은 재방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물론 EBS 홈페이지(www.ebs.co.kr)에서도 이 방송을 다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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