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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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구 | ‘5·18기념식 논란’ 주역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편향된 역사인식 바로잡는 게 내 임무”

‘이념 선명성 과시’ 親朴 속내와 맞물려 보수층 결집 아이콘으로?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6-05-23 10: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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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그려보자. 조만간 박근혜 대통령이 강한 이념성향의 인물을 요직에 지명한다면, ‘내 갈 길 간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보수층 결집을 노린다면 하반기 정국은 어떻게 될까.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과 관련해 보여준 일련의 행보가 대통령 눈에 마이너스일 리 없는 이유다.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을 지낸 그의 경력을 감안하면 국가정보원장에 임명하지 못한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농담처럼 시작한 이야기, 그러나 곱씹어볼수록 그럴듯하다.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36주년 기념식을 두고 정국이 얼어붙은 5월 중순, 여권 관계자와 나눈 대화 한 토막. 출발점은 박근혜 대통령이 당장 대규모 개각을 통해 쇄신을 추진하는 건 어차피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계산이다. 20대 국회 개원 직후 서슬 퍼런 의원들이 즐비한 인사청문회가 기다리고 있고, 이를 통과한다 해도 새 장관들은 업무 파악도 끝나기 전 대정부질의와 국정감사에 맞닥뜨려야 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국정 장악력은 바닥을 찍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반대 카드는 어떨까. 아예 야권이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인물을 국정원장 등 요직에 지명해 청문회에 세운다면? 여소야대 상황에서 통과는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이 과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것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특히 그 시점이 최근 핫이슈로 떠오른 새누리당 분당과 맞물린다면 ‘이념적 선명성 과시’는 필수 과제에 가까워진다. 청와대와 친박(친박근혜) 핵심이 보여주고 있는 거센 ‘권력의지’에는 오히려 이쪽이 더 걸맞아 보인다는 것. 며칠 전만 해도 주목하는 이 없던 ‘박승춘’이라는 이름 석 자가 이제 상당한 정치적 맥락을 갖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과서 무인’에서 ‘강성 발언자’로

    생각해보니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기자가 박승춘 처장을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그가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에서 물러나던 시점이었다. 육사 27기로 임관한 뒤 30여 년간 대북정보부서에서 일하던 그는 이 무렵 벌어진 북한 경비정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 사건 때 남북 함정 간 교신 내용 등을 일부 언론에 공개했다 청와대와 군 수뇌부가 이를 문제 삼자 자진 전역을 택했다. 신문지면에 그의 이름이 대서특필된 첫 사건이었다.



    박 처장 본인은 당시 일을 “북측의 일방적 주장이 잘못됐음을 알려야 한다는 신념에 따른 결정이었다”고 회고하곤 했지만, 뿌리에 남북한 사이 긴장 고조를 원치 않았던 노무현 정부와 갈등이 있었음은 잘 알려진 일.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첫 국군의 날이던 2003년 10월 1일 행사에서 제병지휘관으로 대통령 사열을 보좌했다는 사실이다. 이듬해 5월 말 정보본부장으로 진급한 그가 한 달 남짓 지난 7월 앞서의 사건으로 군문(軍門)을 떠나게 됐던 것이다.

    기자가 기억하는 이 시절의 그는 ‘교과서적인 무인(武人)’이었다. 큰 키에 두둑한 턱, 얼굴 위에 언제나 엷게 흐르는 미소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심리적 우위를 잃지 않겠다’는 자세가 엿보이곤 했다. 군복을 벗은 뒤에도 당시 사건에 대해 한사코 말을 아끼던 모습은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이슈와 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속내를 읽기에 충분했다.

    변화가 느껴진 것은 100여 차례에 가까운 안보 강연을 진행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2007년 즈음 일이다.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 중심의 시국 강연회에서 서울 용산참사에 대해 “친북세력과의 전초전이 될 수 있다”고 발언한 것은 ‘군인 박승춘’만을 기억하는 많은 이에게 뜻밖의 일이었다. 이러한 행보는 이내 정치 참여로 이어진다. 200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캠프의 주요 멤버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한 것. 당시 캠프 관계자들은 남재준 전 국정원장 등과 함께 안보 분야와 관련해 박근혜 후보가 자문하는 3~4인 중 한 명이었다고 전한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는 박 처장이 국가보훈처장에 임명된 게 2011년이었다는 점을 들어 ‘이명박 정부의 사람이었다’고 분석하지만, 정작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박 처장 임명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친박 진영을 ‘배려’해 차관급 공직을 내준 케이스였다는 것이다. 유력 대권주자였던 박근혜 의원에게 당시 청와대가 내민 유화 제스처였던 셈이다. 박 처장의 정치 참여와 공직 진출이 모두 박 대통령과의 두터운 인연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항명? 오히려 이심전심

    기자에게 가장 또렷이 남아 있는 기억은 보훈처장 취임 직후였던 2011년 진행한 간단한 인터뷰였다. 면담 내내 ‘4·19로 상징되는 민주화와 5·16에서 비롯된 산업화’ 사이 균형을 강조한 그는 “어느 한 분야만 중점적으로 부각함으로써 국민이 편향된 인식을 갖게 됐고 이것이 국민 안보의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잘라 말했다. 인터뷰 수일 뒤 그는 “‘(한국의) 발전과정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젊은이들이 올바로 알고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갖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는 문장이 기사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며 보충을 청했다. ‘국가유공자의 예우시책과 참전군인 및 제대군인 지원사업을 시행’하는 보훈처 업무와 ‘국민의 편향된 역사인식을 바로잡는 일’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생각에는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그와 오랜 기간 교유해온 한 전직 군 관계자는 “최근 논란에는 지난해부터 불거진 재향군인회 사건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말한다. 향군 집행부 비리 사건이 불거지면서 진행된 신임 회장 선거 역시 논란에 휩싸였고, 주무부처인 보훈처는 관리·감독에 소홀했다는 호된 비판과 함께 대부분의 이해관계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아왔다. 전역 이후 공직 임명 전까지 향군과 두터운 인연을 맺었던 박 처장으로서는 이들의 시선을 어느 때보다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리라는 것. ‘임을 위한 행진곡’ 논란과 관련해 보훈처가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며 당초 태도를 고집한 것은 이와 무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놓고 보면 박 처장의 ‘합창 방침 유지’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는 비교적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박근혜 정부에서 일한 한 전직 당국자는 “대통령과의 오랜 관계를 감안하면 ‘항명설’은 어불성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굳이 따지면 오히려 이심전심(以心傳心)에 가까웠으리라는 것. 박 처장의 ‘준거집단’이 야인(野人) 시절 동고동락했던 보수성향 단체들이라는 사실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 서두에서 본 ‘전통적 지지층 결집을 통한 정국 돌파’ 시나리오까지 연결한다면? 그의 이름 석 자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게 이번이 끝이 아닐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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