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의 인체 유해성이 속속 밝혀지는 가운데 피해 사례 접수와 건강검진에 대한 정부의 홍보 부족 및 부처 간 책임 전가로 국민의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 1994년 이래 가습기 살균제를 쓴 것으로 추정되는 국민은 800만여 명. 그중 많은 수가 과거 자신이 앓은 호흡기질환과 폐질환이 가습기 살균제와 연관 있는지, 혹은 그 영향이 현재나 미래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지 노심초사하고 있다.
하루 종일 전화해 알아낸 피해 접수처
정부는 2014년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례를 환경부 산하기관을 통해 접수하고 있지만 제대로 홍보가 되지 않아 극소수 피해자만 이를 이용하는 실정이다. 실제 이런 과정을 거쳐 검사비와 진료비를 지급받은 인원은 추산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런 내용을 알지 못하는 대다수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사용자들)는 가까운 병·의원을 찾아 증상을 호소해보지만, 각 의료기관은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봐 “모르는 내용”이라며 상담조차 거부하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은 각 지방자치단체에 속한 관할 보건소도 마찬가지다.가습기 살균제 사용으로 발생한 질환 진단과 피해 사례 접수를 질병을 진단 및 치료하는 의료시스템과는 전혀 무관한 환경부가 전담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전문가들은 “가습기 살균제가 어떤 피해를 주는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나 환경부에만 맡겨놓고 다른 의료 관련 부서들이 손을 놓고 있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주간동아’는 사용자들의 처지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례를 어디에 접수하면 되고, 진단은 어디에서 어떻게 받으면 되는지를 직접 알아봤다. 자신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각 의료기관에서 퇴짜를 맞은 후 하소연할 수 있는 기관은 당연히 보건복지부(복지부)와 그 산하기관인 질병관리본부(질본) 또는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 자신의 몸이 아팠거나 현재 아픈데 환경부나 산업자원부에 먼저 전화를 건다는 게 비상식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일단 복지부와 그 산하기관은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복지부 보건의료정책과 담당자는 “질병 관련 내용은 질본에 문의하는 것이 맞는 듯하다”고 말했다. 질본은 환경부로 책임을 미뤘다. 질본 위기소통담당관실 관계자는 “질본은 감염병을 담당하는 곳이라 가습기 살균제 관련 내용은 모른다. 환경부 소관이니 그쪽에 연락하라”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진단 및 보상과 관련한 자체 가이드라인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현재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해서는 대응하지 않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관련 문제는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과가 담당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곳에 문의하라”고 답변했다.
환경부에 3시간가량 계속 전화했지만 통화 중임을 알리는 메시지와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사이 관련 시민단체와 피해자단체에 전화를 해봤다. 이곳 또한 통화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통화가 연결된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는 “요즘 가습기 살균제 관련 상담전화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이 관계자는 “보도를 보고 연락을 해오는 분이 많다. 가습기 살균제를 쓰는 동안 호흡기 질병을 앓았는데 어떻게 하면 보상받을 수 있는지, 어디서 검사를 받아야 피해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많다. 자세히 안내하고 싶지만 인원에 비해 너무 많은 전화가 걸려 와 대응이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1년 초까지 가습기 살균제를 꾸준히 써왔다는 대구지역 최모(55·여) 씨는 “2000년부터 호흡기질환이 심해지고 2004년에는 폐렴에 걸렸는데 그것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인지 알고 싶어 주변 병·의원에 물어봤더니 모두 자기네들은 그런 진단을 하지 않는다고 오지 말라고 한다. 도대체 어디에 물어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도 엑스레이를 찍으면 폐에 뿌옇게 흐린 부분이 보이는데, 가습기 살균제 장기 흡입으로 폐섬유화가 진행돼 앞으로 건강상 문제가 생길까 봐 겁이 난다. 이런 걱정 때문에 생업에 지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믿기 어려운 환경부 피해 조사
박한선 성안드레아 신경정신병원 정신과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가습기 살균제 노이로제는 일종의 집단 공황”이라고 진단했다. “건강해지려고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로 오히려 사람이 죽는 아이러니한 상황 때문에 사회적 불안이 높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상황일수록 국민에게 공신력 있는 정보를 빨리 제공해야 불안이 가라앉는다. 현재까지 밝혀진 상황을 정확히 알리고 대응 방안도 빠르게 전달해야 사회 전체의 불안 상태가 해소될 수 있다”고 처방했다.
환경부에 6시간 동안 40통의 전화를 걸어 결국 얻어낸 답변은 “한국환경산업기술원(기술원) 인터넷 홈페이지(www.keiti.re.kr)에 접속하면 자세히 나와 있다”는 안내뿐이었다. 장장 6시간 만에 들은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실제 기술원 홈페이지에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조사 신청 접수’ 배너가 뜬다. 기술원은 4월 25일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의심되는 이들로부터 폐질환 인정신청서를 접수받고 있었다. 환경부 관계자는 “현재 가습기 살균제 피해라고 밝혀진 폐질환 관련 내용에 대해서만 인정신청서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기술원은 폐질환 인정신청이 접수되면 피해조사위원회(조사위) 위원을 파견해 가습기 살균제 사용이력을 확인하는데, 구매 영수증이 없을 경우에는 설문조사를 통해 검증한다. 조사위를 통과한 피해자는 기술원이 지정한 병원이나 의료기관에 배정돼 검사를 받은 후 그 결과를 바탕으로 환경보건위원회가 피해자의 폐질환 인정 여부를 확정하게 된다. 검사비용은 전액 무료이며 폐질환이 인정되면 치료비 등 지원액을 신청할 수 있다. 지원액도 환경보건위원회 심의를 거쳐야 지급 여부가 결정된다.
가장 큰 문제는 기술원의 피해 조사가 폐질환에만 한정돼 있다는 사실이다. 폐질환 외 비염, 기관지염 같은 호흡기질환(상기도질환)은 지원 대상에서 아예 빠져 있다. 예를 들어 기관지염 때문에 숨 쉬기가 곤란한 상황인데도 무료 검진조차 받지 못하는 상황. 환경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성이 확실히 입증된 것이 폐질환뿐이라 피해 조사도 이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더욱이 기술원의 피해 인정 판단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고, 설령 어렵게 피해 인정을 받는다 해도 진료비 등 지원액은 5년 안에만 지급하게 돼 있다는 점도 피해 구제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쉽게 말해 피해 사례 신청을 해도 차일피일 미루면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환경부가 2015년 한 해 동안 조사한 결과 피해 조사 신청을 한 인원은 752명. 환경부는 아직 이들에 대한 조사와 판정을 진행 중이다. 이를 통해 무료 검진을 받은 사람의 정확한 수나 지원금액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피해 조사 전반에 문제가 많다. 접수를 제대로 받지 않는 경우가 많고, 조사도 늦어져 현장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고 말했다. 강찬호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 대표는 “환경부가 적극적으로 피해자들을 만나야 하는데, 자진 신고에 기대려 하는 게 문제다.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은 환경부보다 국무총리실 차원에서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려 조사와 후속 조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용자들의 피해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의료 영역임에도 환경부가 이를 전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피해 구증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된다. 지금처럼 환경부가 피해자 검진과 피해 여부 판단을 홀로 진행하는 이유는 ‘환경오염이나 유해화학물질 중독 때문에 생기는 질환은 환경부가 담당한다’는 현행 환경보건법 규정 때문이다. 현재 관련법에 따르면 각 화학약품과 질환 발병 경로마다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모두 다르다. 농약 중독 문제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의약품 관련 문제는 보건복지부가 담당한다. 공산품 관련 문제는 산업통상자원부가 맡는다. 그 외 화학물질관리법에 따른 유해화학물질은 환경부가 담당하고 있다.
국민 건강 지킬 컨트롤타워가 없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일원화되지 않은 대응체계를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원인물질 관리 부처와 질병 관리 부처를 총괄할 수 있는 컨트롤타워를 만들고 거기서 피해 보상이나 건강검진 같은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경호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화학약품이나 의약품 일반에 문제가 생길 시 대응할 수 있는 통합관리기구를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가습기 살균제 피해 조사 및 대응을 환경부에서 맡는 것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대응하고 있느냐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담당 기관 없이 한참을 표류하다 2015년 1월 화학물질관리법을 통해 환경부 소관이 됐다. 임시방편 식의 대응이었던 만큼 실질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처럼 전례가 없는 화학약품 관련 질병이 생기면 현재 같은 부서별 대응으로는 제대로 된 질병 관리를 할 수 없다. 국민의 불안을 막고, 효율적인 화학약품 질병 관리를 위해서라도 통합관리전담팀을 만들거나 관련 사안을 한 부처가 담당할 수 있도록 관리체계를 통합해야 한다.”
생활화학용품 전반으로 퍼진 노이로제▼ ‘페브리즈’ 신발 탈취제 등 환경부 조사 발표 후 국민 불안 오히려 증폭
생활화학용품에 대한 국민의 노이로제는 가습기 살균제에 그치지 않았다. 국민은 생활용품 전반으로 의심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P&G의 섬유탈취제 ‘페브리즈’가 대표적 제품이다.
페브리즈에 독성 화학물질 성분이 포함돼 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전부터 흘러 다녔다. “페브리즈에 함유된 4급 암모늄 클로라이드(DDAC)에 흡입독성이 있어 폐 섬유화를 일으키거나 세포 변형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한국 P&G 측은 “국내 독성물질로 지정된 약품은 들어 있지 않다”고 해명했지만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검증에 나선 환경부는 5월 17일 페브리즈 성분과 함유량을 전면 공개했다. 발표된 핵심 내용은 “미국과 유럽 제품에 비해 오히려 적은 양이 들어 있어 호흡기에 심각한 위해를 주는 수준은 아니다”라는 것. 그럼에도 국민의 공포는 오히려 더 증폭됐다. 환경부의 발표는 “미국 환경보호청(EPA)과 유럽연합(EU)에서도 허용된 수준”이라는 내용만 담고 있을 뿐, 각 성분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 살균제에 쓰인 유독물질 성분(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이 신발 탈취제에서 검출되는 등 7개 생활용품에서 유독물질이 확인됐다”는 발표 또한 국민의 불안을 부추겼다. 환경부가 지난해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생활화학용품 331개를 대상으로 안전기준 위반 여부를 조사한 결과 7개 제품에서 PHMG를 포함한 유독물질이 검출됐다는 것. 문제는 이 제품이 모두 국가가 인정한 시험·분석 기관의 안전기준을 통과해 판매된 것들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