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와 JP가 연대해서 신당을 만든다, 정치의 지각변동이 임박했다는 말이 들린다. 웬 빛바랜 80년대 신문을 보는 듯하다. 아닌게아니라 ‘두 사람의 신당창당 기도는 철저하게 지역주의에 기초했고 시대착오적 극우이념으로 우리 정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라는 비난이 나왔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없다는 듯 영남과 충청을 오가며 태연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오랜 기간 반독재투쟁을 함께 한 DJ를 가장 극렬하게 비난하는 YS와 YS에게서 ‘토사구팽’을 당하고 DJ와 공조했다가 다시 파탄으로 치달은 JP가 YS를 다시 만나는 이 어지럽고 황당한 합종연횡이 계속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정치의 지형이 아직도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사실 YS가 가장 먼저 DJ를 향해 욕을 해댄 것도 정작 나라가 위기에 빠져서라기보다는 호남 독식에 대한 ‘지역의 분노’를 대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복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극우보수적 목소리는 좌에서 극우까지의 그가 가진 정치적 스펙트럼의 한 측면일 뿐이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좌, 우 어느 쪽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 화제를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해면동물 같은 이념적 탄력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를 두고 ‘정치 9단’이라 하는 것이다.
JP는 어떤가. 충청의 여왕처럼 군림하며 우에서 극우에 이르는 이념적 레퍼토리로 노래하다 변심한 애인의 좌경을 헐뜯는 모습이다. 충청의 억하심정을 업고 JP가 갈지자 행보를 거듭할 수 있던 것도 실은 ‘무이념 지역패권’이라는 정치의 한국병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일 뿐이다.
정작 불쌍하고 한심한 것은 이들 3김에게 휘둘리는 지역주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럼 또 누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일리가 있다. 호남인사 편중문제, 또 다른 경제파탄을 우려할 만큼 악화된 경제상황으로 가뜩이나 흉흉한 민심에 기름을 붓고 이데올로기로 불을 붙인 것이 햇볕정책 파동이었다면, 이들이 정치에 대한 실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대안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한국정치의 함정이다. 여기에 정치가 이렇듯 3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경제회생의 발목을 잡고 국민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3김의 카르텔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 말고 누가 있느냐’는 이야기에서 ‘야당 역시 또 다른 패거리정치를 답습하고 있지 않느냐’ ‘개혁파들도 말만 많았지 여야 어디서도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지리멸렬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러니 3김 아니면 누구라도 좋다고는 말못하는 딱한 처지에 빠지는 것이고, ‘누가 되면 다 망한다’는 식의 협박을 받으며 조폭식 의사결정에 내몰리는 것이다.
이렇듯 은퇴를 모르는 3김 정치가 마치 후삼국 시대처럼 지속되는 것은 그들의 수익구조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 대려는 사람이 줄을 잇고 정치란 살아 움직이는 거라며 그들과 관계하는 수많은 ‘정치업자’들이 있는 한, 이들은 불패의 벤처처럼 상종가를 구가할 것이다. 그 수익구조를 깨는 것은 어렵다. 역시 1987년 6월 항쟁에서 그랬듯 이제 또다시 대중의 지혜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정치의 한국병,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하자. 3김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이 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가감 없이 솔직하게 인식해야 한다.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를 선택한 국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망국적 정치 한국병을 누가 가장 잘 떨쳐낼 수 있겠는지 생각해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정치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21세기 한국의 뉴 리더는 이렇듯 만들어지고 있으니 너무 성급하게 완성품만 찾다가 실망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좀더 긴 호흡으로 선택하자.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든 DJ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3김의 메리고라운드에 들어가지 않고, 명실상부하게 정치를 졸업하고 은퇴한 보통사람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벨평화상보다 더 중요한 업적이 될 수 있다. 실은 JP나 YS도 잠들기 전에 더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름다운 노년을 즐기면 좋으련만.
오랜 기간 반독재투쟁을 함께 한 DJ를 가장 극렬하게 비난하는 YS와 YS에게서 ‘토사구팽’을 당하고 DJ와 공조했다가 다시 파탄으로 치달은 JP가 YS를 다시 만나는 이 어지럽고 황당한 합종연횡이 계속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한국정치의 지형이 아직도 지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사실 YS가 가장 먼저 DJ를 향해 욕을 해댄 것도 정작 나라가 위기에 빠져서라기보다는 호남 독식에 대한 ‘지역의 분노’를 대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복귀를 정당화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극우보수적 목소리는 좌에서 극우까지의 그가 가진 정치적 스펙트럼의 한 측면일 뿐이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좌, 우 어느 쪽에 가까운 이야기를 해 화제를 집중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마치 해면동물 같은 이념적 탄력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를 두고 ‘정치 9단’이라 하는 것이다.
JP는 어떤가. 충청의 여왕처럼 군림하며 우에서 극우에 이르는 이념적 레퍼토리로 노래하다 변심한 애인의 좌경을 헐뜯는 모습이다. 충청의 억하심정을 업고 JP가 갈지자 행보를 거듭할 수 있던 것도 실은 ‘무이념 지역패권’이라는 정치의 한국병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일 뿐이다.
정작 불쌍하고 한심한 것은 이들 3김에게 휘둘리는 지역주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럼 또 누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일리가 있다. 호남인사 편중문제, 또 다른 경제파탄을 우려할 만큼 악화된 경제상황으로 가뜩이나 흉흉한 민심에 기름을 붓고 이데올로기로 불을 붙인 것이 햇볕정책 파동이었다면, 이들이 정치에 대한 실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대안이 없다고 느끼는 것은 한국정치의 함정이다. 여기에 정치가 이렇듯 3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경제회생의 발목을 잡고 국민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3김의 카르텔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정치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 말고 누가 있느냐’는 이야기에서 ‘야당 역시 또 다른 패거리정치를 답습하고 있지 않느냐’ ‘개혁파들도 말만 많았지 여야 어디서도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지리멸렬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러니 3김 아니면 누구라도 좋다고는 말못하는 딱한 처지에 빠지는 것이고, ‘누가 되면 다 망한다’는 식의 협박을 받으며 조폭식 의사결정에 내몰리는 것이다.
이렇듯 은퇴를 모르는 3김 정치가 마치 후삼국 시대처럼 지속되는 것은 그들의 수익구조가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줄 대려는 사람이 줄을 잇고 정치란 살아 움직이는 거라며 그들과 관계하는 수많은 ‘정치업자’들이 있는 한, 이들은 불패의 벤처처럼 상종가를 구가할 것이다. 그 수익구조를 깨는 것은 어렵다. 역시 1987년 6월 항쟁에서 그랬듯 이제 또다시 대중의 지혜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정치의 한국병, 더 이상은 안 된다고 말하자. 3김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이 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가감 없이 솔직하게 인식해야 한다.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를 선택한 국민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망국적 정치 한국병을 누가 가장 잘 떨쳐낼 수 있겠는지 생각해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정치에서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21세기 한국의 뉴 리더는 이렇듯 만들어지고 있으니 너무 성급하게 완성품만 찾다가 실망하는 우를 범하지 말고, 좀더 긴 호흡으로 선택하자.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든 DJ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3김의 메리고라운드에 들어가지 않고, 명실상부하게 정치를 졸업하고 은퇴한 보통사람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노벨평화상보다 더 중요한 업적이 될 수 있다. 실은 JP나 YS도 잠들기 전에 더 가야 할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름다운 노년을 즐기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