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개 길은 과정일뿐 그 자체가 아니다. 하지만 목적지만 염두에 둔 채 길을 가다 보면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림 같은 산수와 계절의 다채로운 변화도, 그 길녘의 언저리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여로에서는 떠남만 있고 만남은 없다. 그 즈음에 가장 운치 있을 법한 국도나 지방도를 따라가면서 만난 풍광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와 사진을 실을 작정이다. 이야깃거리와 볼거리가 풍성한 길은 2~3회 걸쳐 나눠 실을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
처음부터 끝까지 외진 두메산골로만 이어지는 446번 지방도는 산 높고 골 깊은 강원도 산수(山水)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사실 이 길은 이름만 지방도일 뿐, 실제로는 흙먼지 폴폴 날리는 산길 구간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지프형 승용차조차 지나다닐 수 없을 정도로 비좁고 거친 오솔길 구간도 있었다. 지금도 전체 구간의 절반 이상은 비포장도로이고, 그나마 승용차로도 무리없이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노면상태가 좋아진 것은 근래의 일이다.
흙먼지 날리는 구절양장 산길
446번 지방도는 크게 세 구간으로 나뉜다. 첫째 구간은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상남면 상남리까지, 둘째 구간은 상남리에서 홍천군 내면 광원리 사이이고, 내면 명개리부터 평창군의 월정사 초입까지가 마지막 구간이다. 다 같은 446번 지방도인데도 구간마다 노면상태와 주변 풍광이 서로 판이하다. 첫째 구간은 쓸쓸한 산길이고, 둘째 구간은 상쾌한 물길을 따라가며, 마지막 구간은 태산처럼 높고 듬직한 산 하나를 가로지른다.
44번 국도에서 갈라지는 첫째 구간은 시작부터 비포장도로다. 그것도 긴장감이 앞서는 오르막길이다. 그러나 이 비포장 구간은 300m쯤 가다가 싱겁게 끝나고 엊그제 완공된 듯한 왕복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곧바로 이어진다. 새뜻하게 닦인 길보다도 가을 빛깔을 잔뜩 머금은 산과 숲이 더 눈부시게 화사하다. 이처럼 길 좋고 풍광 좋은데도 차와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길 주변에 듬성듬성 앉아 있던 민가는 갑둔고개를 넘어 다시 비포장 구간에 들어서자 아예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도로 주변의 제법 너른 평지에는 사람 살았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지만 정작 주인 되는 이들은 좀체 마주치기 어렵다. 어느 시골마을이든지 나날이 빈집과 묵정밭이 늘고 있는 추세지만, 이처럼 몇 개의 마을이 텅 비어 있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다. 아이들이 뛰놀던 학교 운동장에는 군부대 야전 막사가 설치돼 있고, 주민들의 경운기와 트럭이 오가야 할 길에 탱크를 앞세운 보병들의 긴 행렬이 지나는 광경을 보고서야 폐촌(廢村)이 된 까닭이 짐작됐다.
쓸쓸해 보이는 첫째 구간과 달리, 인제군 상남면 소재지에서 시작되는 둘째 구간의 풍정은 한결 푸근하고 경쾌하다. 무엇보다 산정에서 골짜기 아래에 이르기까지 오색찬란한 단풍숲이 가을 여로에 나선 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게다가 울긋불긋한 산자락에 등을 댄 집집마다 고향집처럼 푸근해 보이고, 줄곧 내린천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길의 율동감은 날아갈 듯 경쾌하다. 수년 동안 끌어온 확장·포장 공사가 두어 달 전에 모두 끝나 도로의 노면상태도 아주 좋다.
상남면 소재지에서 11km쯤 떨어진 미산리의 버스 종점 앞에는 작은 콘크리트 다리가 하나 놓여 있다. 개인약수터가 있는 개인동에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방태산(1435m) 중턱의 해발 800m쯤 되는 전나무 숲에 자리잡은 개인약수는 1891년 지덕삼이라는 포수가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강원도 내륙지방의 다른 약수와 마찬가지로 위장병, 피부병 등에 효험이 있다는 탄산철분 약수다. 물맛은 단물 뺀 사이다 같고, 철분 함유량이 많아 녹내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탄산철분 약수를 처음 맛보는 이들은 대체로 물을 입 안에만 넣었다가 삼키지 못하고 도로 내뱉기 일쑤다.
미산리 버스 종점에서 홍천군 내면 살둔마을 사이의 7km 구간은 그야말로 무인지경(無人之境)이다. 볕바른 산비탈에도 집 한 채 없다. 더 우뚝해진 산과 깊숙해진 골짜기 사이로 손바닥만한 하늘만 빠끔히 열려 있다. 사방을 둘러봐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해발 1000m를 넘는 고봉들과 맞닿은 산줄기뿐이다.
오대산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마지막 구간은 446번 지방도의 하이라이트다. 내린천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둘째 구간의 눈부신 풍광도 이 마지막 구간을 위한 예고편에 불과하다. 오대산은 산세가 듬직하고 숲이 울창하다. 숲이 좋은 산은 단풍도 고울 뿐 아니라 철철이 다양한 야생화가 피고 진다. 또한 이 산은 예로부터 문수신앙이 살아 숨쉬는 불도량(佛道場)으로도 이름 높다. 천 년의 내력을 이어온 월정사 상원사가 이 산자락에 깃들인 것도 그런 발심(發心) 덕택이다. 446번 지방도의 마지막 구간은 바로 이 오대산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조붓한 산길이다. 생명력 넘치고 신앙심 도타운 산을 넘어가는 길이라 운치가 아주 그만이다. 잘 다져진 흙길의 감촉이 아주 편안하고, 30km에 달하는 구간 전체가 울울창창한 숲과 전망 좋은 산허리를 거쳐간다. 특히 이 길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월정사 초입의 전나무 숲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꼽힐 만큼 운치 있고 아름답다.
강원도 내륙을 동서로 관통하는 446번 지방도의 전체 거리는 도중에 거치는 국도의 일부까지 합해도 대략 90km쯤 된다. 마음먹고 달리면 승용차로 두어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거리다. 하지만 길 자체가 여행의 과정이자 목적이라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고갯마루에 서서 산 아래를 굽어보기도 하고, 길녘 언저리에 사는 주민과 정담도 나누고, 단풍터널을 이룬 가을 숲길도 걸어보고…. 짧은 길도 쉬엄쉬엄 가다 보면 노루꼬리만한 가을 하루가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