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파운드리 반도체업체 대만 TSMC. [TSMC]
반도체업체는 크게 메모리, 시스템, 파운드리(foundry·위탁생산) 등 세 분야로 나뉜다. 데이터 저장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메모리 반도체업체 중 세계 1위는 한국 삼성전자다. 시스템 반도체는 연산·처리를 담당하는 ‘두뇌’ 격으로 인텔이 세계 1위다. 파운드리는 TSMC가 세계 최대 업체다. 파운드리는 설계는 하지 않고 팹(fab: fabrication의 줄임말)을 통한 반도체만 생산하는 업체로, 팹리스(fabless) 업체와 반대된다. 반도체업계에서 팹은 공장을 의미하는데, 공장 없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을 팹리스라고 부른다.
TSMC가 파운드리 업체 중 최고를 유지하는 비결은 기술력이다. TSMC는 ‘대만 반도체업계 대부’ 장중머우(張忠謀·모리스 창·90) 전 회장이 1987년 세운 회사다. 당시 세계 반도체 산업은 미국 IBM, 일본 도시바 등 설계와 생산을 모두 맡는 종합 반도체(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IDM)업체가 장악하고 있었다. 2018년 은퇴한 장 전 회장은 반도체 설계와 생산이 분업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파운드리라는 비즈니스 모델을 최초로 고안했다. 이후 장 전 회장은 재임 중 기술력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TSMC는 그동안 10nm(나노미터: 1nm=10억 분의 1m), 7nm 개발을 선도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강력한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
파운드리 사업 재개를 선언한 미국 인텔 본사. [인텔]
겔싱어 CEO는 인텔 전성기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파운드리 사업을 새로운 도약 기회로 삼으려는 계획인 듯하다. 인텔이 자체적으로 설계해온 반도체 생산 외에도 구글, 퀄컴 등 자국 주요 고객사들로부터 위탁 물량을 넘겨받아 향후 새 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인텔은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개인용 컴퓨터(PC) 산업을 주도하는 양대 산맥으로 꼽혔지만, 스마트폰과 태블릿PC 같은 모바일 기기가 PC를 위협하면서 사업 성과가 정체된 상태다. 더욱이 ‘무어의 법칙’으로 불리던 인텔의 칩 성능 개선 역시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강력한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도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을 재개하는 이유가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는 21세기 편자의 못”이라면서 미국 반도체 기업의 생산 능력을 향상시킬 방안을 검토하라는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바이든 정부 입장에서는 중국과의 첨단기술 패권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데다, 전기차를 비롯한 새로운 산업 수요가 늘면서 반도체의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다. 특히 미국 의회 등에서는 미국 반도체업체들이 아시아 업체들에 반도체 생산을 위탁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 의회는 최근 ‘반도체 생산 촉진을 위한 지원 법안(CHIPS for America ACT)’을 통과시켰고, 이에 따라 인텔 등 미국 반도체업체들은 투자 세액 공제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인텔 추격에 느긋한 TSMC
5nm 칩을 양산하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삼성전자]
글로벌 시장조사 전문업체 트렌드포스는 1분기 전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이 TSMC(56%), 삼성전자(18%), 대만 UMC와 미국 글로벌파운드리(7%), 중국 SMIC(5%) 순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TSMC의 시장 장악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28~65nm 범주에서 TSMC 비중은 매출 기준 40~65%에 이른다. 이 범주의 칩은 자동차에 탑재된다. 최첨단인 5~10nm 범주에선 TSMC가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반면 인텔 기술력은 14nm 수준이다. 인텔이 앞으로 빠른 시일 내 7nm 공정에 이어 5nm 이하 초미세공정 수준에 도달한다면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겔싱어 CEO도 “인텔은 소프트웨어, 반도체와 플랫폼, 패키징과 제조 과정을 모두 갖춘 유일한 기업”이라면서 “7nm 공정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준비를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텔 측은 2분기 7nm 칩 설계를 마치고 2023년쯤 생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시장조사 전문기관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인텔이
3년 후 TSMC와 삼성전자에 이어 파운드리 시장에서 3위 업체로 올라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계획을 고려하면 인텔이 TSMC와 삼성전자의 기술력을 단기간 내 따라잡기는 힘들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하지만 국제 반도체 전문가들은 기술력과 자본이 충분한 인텔이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다면 중장기적으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내다본다. 특히 인텔은 5nm 이하 첨단 공정에 필요하고 네덜란드 ASML이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적극 나서고 있다. EUV는 ASML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 및 공급하고 있는데, 10nm 이하 반도체 생산에서 핵심 장비로 꼽힌다.
사령탑 부재로 의사 결정 더뎌진 삼성전자
TSMC는 인텔의 도전에 맞서 기술력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류더인(劉德音) TSMC 회장은 “TSMC의 3nm 공정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기술 리더십은 TSMC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TSMC는 또 올해 최대 280억 달러(약 31조6900억 원)를 투자할 방침이다. 이는 지난해 투자 규모인 172억 달러(약 19조 4700억 원)에 비해 60% 이상 증액된 규모다. TSMC는 또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 6개를 설립하는 데 360억 달러(약 40조7500억 원)를 투자하겠다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TSMC의 의도는 경쟁사인 삼성전자와 격차를 더욱 벌리고 인텔의 도전에도 대비하겠다는 것이다.반면 TSMC를 상대로 숨 가쁜 추격전을 벌여온 삼성전자는 미국 정부를 등에 업은 인텔과도 힘겨운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TSMC, 인텔과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대규모 투자 등이 필요하지만 삼성전자는 사령탑 부재로 과감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는 처지다. 인텔의 진입은 파운드리 시장 1위인 TSMC보다 삼성전자 측에 더욱 위협적이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앞으로 수주 물량이 줄어들 수 있다. 인텔이 칩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을 종합할 때 TSMC는 앞으로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초격차 전략과 대규모 투자를 바탕으로 상당 기간 독주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