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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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포착해낸 ‘선과 색채의 마술사’

20세기 거장 ‘파울 클레’ 현대 추상회화 개척 … 실재와 환상 어우러져 잠재 세계 표현

  • 중앙대 겸임교수 mkyoko@chollian.net

    입력2006-05-10 16: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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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을 포착해낸 ‘선과 색채의 마술사’

    파울 클레, ‘허공의 성’, 1922

    “‘퇴폐미술전’에서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이 전시회는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문화적 무정부주의의 공통의 근원을 보여주고, 예술의 퇴폐가 글자 그대로 예술의 볼셰비즘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전시회는 해체를 추동하는 세력들이 추구하는 세계관적, 정치적, 도덕적 목표와 의도를 분명히 하려고 한다.”

    모범상에서 근원상으로

    나치가 현대미술을 모욕하기 위해 조직한 ‘퇴폐미술전’(1937) 공식 프로그램 속의 한 구절이다. 이 전시회에는 영광스럽게도(?) 파울 클레의 작품이 일곱 점이나 출품됐는데, ‘광기와 정신병’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전시됐다고 한다. 그전에 나치가 ‘퇴폐적’이라고 하여 공공미술관에서 압수한 작품 중에는 클레의 것이 102점이나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당시에 클레가 나치들에게 현대미술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졌음을 의미한다.

    나치가 아무 근거도 없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성을 지향한 고전예술과 달리 현대예술은 비이성적인 것을 ‘더 높은 진리’, ‘자유를 향한 외침’으로 긍정했다. 클레 자신도 1911년 어느 잡지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예술에는 또한 근원적 시작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민속학 박물관이나 아이들의 방에서 볼 수 있다. 그와 비슷한 현상이 바로 정신병자들의 그림이다.”

    클레가 자연 부족, 어린이, 정신병자의 그림에 주목한 이유는 ‘모범상에서 근원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들뢰즈라면 이를 “창조적이며 동시적 역행”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나치에게 (고전예술의) 모범상에서 벗어나 근원상으로 역행하는 현대미술의 경향은 진화를 거스르는 퇴화의 증거일 뿐이었다. 젊은 시절 클레의 일기장에 적힌 구절은 훗날 조국에서 추방당한 그의 창작을 추동한 힘을 보여준다. “나는 울지 않기 위해(pour ne pas pleurer) 그린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예술적 창세기

    운동을 포착해낸 ‘선과 색채의 마술사’

    파울 클레, ‘바하의 스타일로’, 1919

    예술에는 ‘근원적인 시작’이 있다는 명제는 클레의 세계를 압축한다. ‘근원적인 시작’이란 한마디로 창세를 말한다. 예술의 과제는 이 ‘창조 과정의 기적을 가시화해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주는 사물이 공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거대한 생성과 소멸의 운동이다. 선의 섬세한 움직임과 색의 미묘한 배치로 클레는 ‘사물의 생성의 마법’을 기록한다.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예술적 창세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생성의 바탕에는 운동이 깔려 있다.” 그가 보는 우주는 움직임의 총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여객선을 타고 가는 사태를 보자. 이 사태는 갑판에서 그의 움직임+배의 전진운동+물결의 움직임+지구의 자전+그 위 달과 별들의 회전이 있다. 한마디로 사람이 배를 타고 가는 단순한 사태조차 ‘우주 속의 움직임들의 조합’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레싱의 구분법에 따르면 회화는 공간예술에 속한다. 하지만 클레가 보기에 “공간 역시 시간적 개념이다.” 정지된 회화로 어떻게 운동을 기록할 수 있을까? 그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 가령 지진계(seismograph)는 운동을 공간에 기록하지 않는가. 실제로 클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섬세한 선의 움직임은 지진계를 연상시킨다. 그것들은 생성과 소멸의 드라마를 기록한 우주계(cosmograph)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을 포착해낸 ‘선과 색채의 마술사’

    파울 클레, ‘창조주’, 1934(왼쪽), 파울 클레, ‘붉은 푸가’, 1921

    잠재성의 가시화

    클레의 예술적 신조를 담은 ‘창조의 신앙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 명제는 보통 현대예술은 대상의 재현보다는 지각의 조직화를 지향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나, 거기에는 다른 뜻이 있는 것 같다. 클레는 이를 널리 알려진 유명한 물리학 원리와 연결한다.

    “예전에 사람들은 지상에서 볼 수 있고, 또 기꺼이 보거나 또는 보고 싶어하는 사물들을 묘사했다. 하지만 지금은 가시적인 사물들의 상대성이 분명해졌다. 가시적인 것은 우주 전체에서 그저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 (우주에는) 또 다른 진리들이 엄청나게 많이 잠재되어 있다. 사물들은 더 넓고 더 다양한 의미로 나타난다. 이는 종종 과거의 합리적인 경험과는 모순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보는 우주의 상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지상의 정지라는 것은 물질의 우연한 멈춤에 불과하다. 이를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착시다.” 우리가 지금 보는 우주의 상태가 유일한 것도 아니다. 클레에 따르면 우주란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의 총체이고, 가시적 세계는 그것의 ‘고립된 예’에 불과하다. 클레는 이 실현되지 않은 우주의 잠재성을 풀어 전개해 가시화하려 한 것이다.

    움직이는 회화

    운동을 포착해낸 ‘선과 색채의 마술사’

    파울 클레, ‘언젠가 잿빛 어둠 속에서 나타난’, 1918

    운동을 기록할 때 회화는 음악을 닮아간다. 칸딘스키처럼 클레 역시 음악에 조예가 깊어 솔리스트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였다. 클레가 “음악적 구조물을 조형적인 것으로 번역”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언젠가 지인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그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어도 나는 그의 드로잉이 음악을 옮겨 적은 것이라고 추정했을 겁니다.”

    재미있게도 클레는 당시에 이름을 날리던 쇤베르크의 현대음악보다는 모차르트, 베토벤, 특히 바흐의 고전음악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의 미적 취향이 보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고전음악에서 그의 주목을 끈 것은 푸가의 기법과 같은 폴리포니 구조였을 것이다(폴리포니는 음악에 도입된 공간구조라 할 수 있다). 그가 이렇게 폴리포니에 주목한 데에는 우주론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여러 개의 독립적인 주제가 동시에 공존하는 것은 음악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이는 모든 전형적인 사물들이 한 장소에서만 효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그 어느 곳이나 도처에 뿌리박고 유기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고전음악의 폴리포니는 음악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것에서 발견되는 우주의 원리라는 것이다.

    운동을 포착해낸 ‘선과 색채의 마술사’

    파울 클레, ‘불안정한 평형’, 1922

    음악과 미술의 경계를 허문 예술가에게 문학과 미술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 역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클레는 창작 시도 꽤 남겼다. 클레의 미술작품에 붙은 제목은 고전예술에서처럼 그림 이미지의 동어반복도 아니고, 현대미술에서처럼 분류적 기능만 하는 무의미한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와 상호작용하는 텍스트로 봐야 한다. 그는 제목 붙이는 일을 종종 ‘세례’에 비유했다.

    르네상스 이후 텍스트와 이미지는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었다. 텍스트가 그림에 붙어 제목이 되든가, 아니면 그림이 텍스트에 붙어 삽화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클레의 그림에서는 종종 문자나 기호가 조형적 요소와 병존한다. 때로는 텍스트 전체를 그대로 이미지로 바꿔버리기도 한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보게 되는 화살표는 그림을 마치 텍스트처럼 선형적으로 읽으라고 지시하는 듯하다.

    클레는 문자언어를 마치 형상언어처럼 사용했다. 그의 작품에서 종종 보게 되는 문자나 기호, 텍스트는 실제로 소리 내어 읽어야 한다. 실제 그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 작품에 등장하는 문자를 소리 내어 읽게 했다. 시각과 청각의 공감각으로 관객의 심리에 영향을 끼치려 했던 것이다. 이때 침묵의 장르에 속하던 그림은 음성회화(Laurmalerei), 즉 소리 나는 회화가 된다.

    컨버전스

    운동을 포착해낸 ‘선과 색채의 마술사’

    파울 클레, ‘바바리아의 돈조반니’, 1919

    클레는 칸딘스키처럼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묘사해야 할 대상이 있었다. “대상은 세계였다. 물론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가시적인 대상의 ‘재현’도 아니고, 내면 정신의 ‘표현’도 아니며, 재현과 표현의 대립 너머에 존재한다. 그는 자신을 일종의 영매로 이해하고 있었다. “작품은 저절로 발생한다. 그래픽은 열매처럼 무르익어 저절로 떨어진다. 나의 손은 내가 아닌 어떤 의지의 도구다.”

    클레의 작품은 순수추상이 아니다. 그의 작품에는 나뭇잎, 과일 껍질, 다양한 꽃들, 성게, 해마, 해초, 산호와 나비 등 온갖 환상적인 형상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우주가 가진 잠재성의 총체 중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우주에는 실현되지 않은 대안적 세계가 얼마든지 존재한다. 바로 그것을 가시화하려 했기에 그의 작품에서는 실재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클레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또 스스로 유파를 창시하지도 않았다. 정신만을 표현하려 한 것도 아니고, 순수추상을 지향한 것도 아니다. 외려 고전주의자처럼 형식의 완전성에 집착하는 그의 태도가 어떤 눈에는 충분히 현대적이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으로 실재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함께 어우러진 잠재적 세계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 너머의 디지털 생성의 세계를 지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파울 클레展이 7월2일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소마미술관(구 올림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소마미술관 02-410-1060~6(www.artmuse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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