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한 여인에게 청혼을 받은 뒤 주제에 대해 수년간 ‘엄격한’ 연구를 진행한 끝에 좋은 점 354가지, 나쁜 점 350가지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 다음 자신에게 구애했던 여인을 뒤늦게 찾아갔으나 이미 아이를 둔 유부녀가 돼 있더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평생 독신이었던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에서 “성적 결합이란 두 사람이 서로의 성 기관과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결혼이란 상대의 성적 속성을 사용해 쾌감을 얻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법칙에 따른 필연적인 계약이다. 즉 남녀가 상호 간 성적 속성을 즐기려 한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잣거리라면 음흉한 웃음과 음담패설이 섞일 ‘허리하학적’ 이야기를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놓은 솜씨가 역시 대철학자답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칸트의 ‘결혼론’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다. 여성 처지에서 본다면 결혼은 나쁜 점이 좋은 점보다 4가지 이상은 더 많을 게 분명한 ‘불리한 게임’이라는 것, 즉 결혼의 장단점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쳤다. 또 결혼이 남녀가 서로의 몸을 자유롭게 사용해 쾌락을 얻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은 올바르게 지적했지만 ‘법적인 부부라고 해도 상대의 동의 없이는 상호 간 성기 및 신체 사용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칸트는 간과한 것이 아닐까.
결혼이 비극의 출발이었던 여인이 있다. ‘내 여자’라는 이유로 아내의 몸을 함부로 범하는 남편이 있다. 한 번 출가한 딸은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아버지가 있다. 이혼한 누이가 가문의 수치와 모욕이라고 여기는 오빠가 있다. 딸과 누이, 아내에게 함부로 손찌검하는 남자가 있다.
근대화가 늦은 아시아도 그렇지만 서양에서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고달픈 여성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3월 29일 나란히 개봉한 ‘디어 한나’(패디 콘시딘 감독)와 ‘그녀가 떠날 때’(페오 알라다그 감독)는 유럽 사회를 배경으로 여성의 수난기를 그린 영화다. ‘디어 한나’는 영국이 배경이고, 터키계 독일 여성이 주인공인 ‘그녀가 떠날 때’는 터키와 독일이 무대다. 공교롭게도 한날 한국 팬을 찾은 두 작품은 상처뿐인 여성의 삶을 보여주면서 남성 중심 사회의 편견과 폭력을 고발한다. 여성의 삶을 중심에 놓았지만 나긋나긋하게 속삭이거나 순진한 감상에 젖지 않는다. 벌겋게 단 도가니처럼 강렬한 이야기와 충격적인 결말을 장전했다. 두 편 모두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받고 인정받은 수작이다.
싸움질하는 사내와 한나의 멍자국
‘디어 한나’에는 가진 것은 세상에 대한 적의, 분노뿐인 중년 남자와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고통당하며 사는 중산층 여성이 등장한다. 조셉(피터 뮬란 분)은 입만 열면 욕이고, 걸핏하면 싸움질인 사내다. 세상에 대한 울분을 참을 길 없어 누구라도 걸리기만 하면 시비를 건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는 먹기만 하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해지고, 당뇨에 시달리다 다리가 썩어 자르고 눈도 멀어 죽었다. 홀로 살아가는 조셉은 오늘도 해 떨어지기 무섭게 술집에 죽치고 앉아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폭탄을 안고 살듯 조셉의 삶은 매일 아슬아슬하다.
그런 조셉이 동네 불량배와 시답잖은 싸움을 벌이다 상대에 쫓겨 자선 가게에 숨어든다. 조셉은 그곳에서 자원봉사자인 한나를 만난다. 예의 저주와 악담을 퍼붓는 조셉에게 한나는 “기도해드릴까요?”라고 묻는다. 조셉은 이날부터 뭐에 이끌리듯 자꾸 자선 가게를 찾는다. 적의와 냉소뿐이던 그의 삶에도 점차 변화가 깃든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 얼굴에 그늘과 함께 큰 멍자국이 생겼다. 남편에게 폭행당한 것이다. 한나의 남편은 겉으로는 신실한 신앙인이며 깍듯한 예의를 갖춘 재력 있는 신사처럼 행동하지만, 아내에게 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결국 순수한 우정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지녔을 뿐이던 조셉, 한나 사이도 남편의 표독스러운 눈빛에 걸려들어 오해를 낳는다. 남편의 구타와 강간,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한나는 결국 조셉의 집을 찾는다. 한나는 잠시 남편의 존재를 잊고 조셉과 평온한 나날을 보내지만, 두 사람 뒤에는 끔찍한 비밀이 놓여 있었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배우로도 활동하는 패디 콘시딘은 이 영화를 통해 작가, 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입증했다. 한편에선 독선과 아집, 폭력과 욕설뿐인 인생을 살아온 한 남자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웃어준 존재를 위해 변해가고, 또 한쪽에선 남편 폭력에 길들여진 한 여인이 자신만큼이나 가련하고 절망적인 남자를 만나 순응적이던 자신의 삶을 바꾼다.
가족의 구속과 폭압으로 끔찍한 인생
‘그녀가 떠날 때’는 터키계 독일 여성 우마이(시벨 케킬리 분)가 주인공이다. 이스탄불로 시집간 우마이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다. 자신의 몸 위에서 욕정을 채우는 남편 탓에 우마이의 삶은 환멸뿐이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우마이는 어린 아들과 함께 부모가 사는 독일 고향 집으로 떠난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며 살아온 터키계 무슬림 가족은 우마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과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우마이와 아들을 이스탄불에 있는 남편에게 돌려보내려 한다. 우마이는 가족의 구속과 폭압을 피해 다시 한번 떠난다. 그리고 여성 보호소와 친구 집을 전전하며 독립을 시도하면서도 부모 형제에게 다가가려 애쓰지만 가족은 그를 집안의 수치이자 모욕으로 여긴다. 결국 우마이의 아버지와 남자형제는 우마이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결국 우마이의 인생은 파국을 향해간다.
이 영화의 결말은 호불호가 갈리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큼 충격적이다. 우마이에게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결말을 통해 이 영화는 남성 폭력의 끔찍함을 고발한다. ‘디어 한나’가 새로운 선택이 가져온 변화와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그녀가 떠날 때’는 하나의 결단이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그렸다.
평생 독신이었던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에서 “성적 결합이란 두 사람이 서로의 성 기관과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결혼이란 상대의 성적 속성을 사용해 쾌감을 얻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법칙에 따른 필연적인 계약이다. 즉 남녀가 상호 간 성적 속성을 즐기려 한다면,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잣거리라면 음흉한 웃음과 음담패설이 섞일 ‘허리하학적’ 이야기를 매우 ‘형이상학적’으로 풀어놓은 솜씨가 역시 대철학자답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칸트의 ‘결혼론’에는 몇 가지 허점이 있다. 여성 처지에서 본다면 결혼은 나쁜 점이 좋은 점보다 4가지 이상은 더 많을 게 분명한 ‘불리한 게임’이라는 것, 즉 결혼의 장단점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쳤다. 또 결혼이 남녀가 서로의 몸을 자유롭게 사용해 쾌락을 얻는 가장 합법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은 올바르게 지적했지만 ‘법적인 부부라고 해도 상대의 동의 없이는 상호 간 성기 및 신체 사용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을 칸트는 간과한 것이 아닐까.
결혼이 비극의 출발이었던 여인이 있다. ‘내 여자’라는 이유로 아내의 몸을 함부로 범하는 남편이 있다. 한 번 출가한 딸은 다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아버지가 있다. 이혼한 누이가 가문의 수치와 모욕이라고 여기는 오빠가 있다. 딸과 누이, 아내에게 함부로 손찌검하는 남자가 있다.
근대화가 늦은 아시아도 그렇지만 서양에서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고달픈 여성의 삶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3월 29일 나란히 개봉한 ‘디어 한나’(패디 콘시딘 감독)와 ‘그녀가 떠날 때’(페오 알라다그 감독)는 유럽 사회를 배경으로 여성의 수난기를 그린 영화다. ‘디어 한나’는 영국이 배경이고, 터키계 독일 여성이 주인공인 ‘그녀가 떠날 때’는 터키와 독일이 무대다. 공교롭게도 한날 한국 팬을 찾은 두 작품은 상처뿐인 여성의 삶을 보여주면서 남성 중심 사회의 편견과 폭력을 고발한다. 여성의 삶을 중심에 놓았지만 나긋나긋하게 속삭이거나 순진한 감상에 젖지 않는다. 벌겋게 단 도가니처럼 강렬한 이야기와 충격적인 결말을 장전했다. 두 편 모두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받고 인정받은 수작이다.
‘디어 한나’(패디 콘시딘 감독)
‘디어 한나’에는 가진 것은 세상에 대한 적의, 분노뿐인 중년 남자와 폭력적인 남편 때문에 고통당하며 사는 중산층 여성이 등장한다. 조셉(피터 뮬란 분)은 입만 열면 욕이고, 걸핏하면 싸움질인 사내다. 세상에 대한 울분을 참을 길 없어 누구라도 걸리기만 하면 시비를 건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는 먹기만 하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해지고, 당뇨에 시달리다 다리가 썩어 자르고 눈도 멀어 죽었다. 홀로 살아가는 조셉은 오늘도 해 떨어지기 무섭게 술집에 죽치고 앉아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폭탄을 안고 살듯 조셉의 삶은 매일 아슬아슬하다.
그런 조셉이 동네 불량배와 시답잖은 싸움을 벌이다 상대에 쫓겨 자선 가게에 숨어든다. 조셉은 그곳에서 자원봉사자인 한나를 만난다. 예의 저주와 악담을 퍼붓는 조셉에게 한나는 “기도해드릴까요?”라고 묻는다. 조셉은 이날부터 뭐에 이끌리듯 자꾸 자선 가게를 찾는다. 적의와 냉소뿐이던 그의 삶에도 점차 변화가 깃든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 얼굴에 그늘과 함께 큰 멍자국이 생겼다. 남편에게 폭행당한 것이다. 한나의 남편은 겉으로는 신실한 신앙인이며 깍듯한 예의를 갖춘 재력 있는 신사처럼 행동하지만, 아내에게 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결국 순수한 우정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지녔을 뿐이던 조셉, 한나 사이도 남편의 표독스러운 눈빛에 걸려들어 오해를 낳는다. 남편의 구타와 강간,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한나는 결국 조셉의 집을 찾는다. 한나는 잠시 남편의 존재를 잊고 조셉과 평온한 나날을 보내지만, 두 사람 뒤에는 끔찍한 비밀이 놓여 있었다.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배우로도 활동하는 패디 콘시딘은 이 영화를 통해 작가, 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입증했다. 한편에선 독선과 아집, 폭력과 욕설뿐인 인생을 살아온 한 남자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웃어준 존재를 위해 변해가고, 또 한쪽에선 남편 폭력에 길들여진 한 여인이 자신만큼이나 가련하고 절망적인 남자를 만나 순응적이던 자신의 삶을 바꾼다.
‘그녀가 떠날 때’(페오 알라다그 감독)
‘그녀가 떠날 때’는 터키계 독일 여성 우마이(시벨 케킬리 분)가 주인공이다. 이스탄불로 시집간 우마이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다. 자신의 몸 위에서 욕정을 채우는 남편 탓에 우마이의 삶은 환멸뿐이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우마이는 어린 아들과 함께 부모가 사는 독일 고향 집으로 떠난다. 하지만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며 살아온 터키계 무슬림 가족은 우마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법과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우마이와 아들을 이스탄불에 있는 남편에게 돌려보내려 한다. 우마이는 가족의 구속과 폭압을 피해 다시 한번 떠난다. 그리고 여성 보호소와 친구 집을 전전하며 독립을 시도하면서도 부모 형제에게 다가가려 애쓰지만 가족은 그를 집안의 수치이자 모욕으로 여긴다. 결국 우마이의 아버지와 남자형제는 우마이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로 한다. 결국 우마이의 인생은 파국을 향해간다.
이 영화의 결말은 호불호가 갈리고 논란의 여지가 있을 만큼 충격적이다. 우마이에게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결말을 통해 이 영화는 남성 폭력의 끔찍함을 고발한다. ‘디어 한나’가 새로운 선택이 가져온 변화와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그녀가 떠날 때’는 하나의 결단이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