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1

..

‘전자 교과서’로 수업하면 교실 엉망 된다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12-04-02 09:3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전자 교과서’로 수업하면 교실 엉망 된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교과서 개편을 위한 자문회의 자리에서 문화체육관광부 관료 한 사람이 무용 교과서를 전자책으로 만드는 중이라고 자랑했다. 그 관료는 “무용 동작을 잘하지 못하는 교사를 위해 무용 동작을 촬영한 전자책을 프로젝션TV로 보여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쏴붙였다. “그게 어찌 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국민 체조지! 전자회사 재고 처리해줄 생각만 하지 말고 아이들 좀 살립시다.”

    한국 교육당국은 교과서 전자화를 서둘렀다. 교육 현장에서도 ‘토건정책’처럼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는 일이 벌어졌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엔 종이 교과서를 디지털 교과서로 바꾸겠다는 계획을 내놨지만, 현 정부 들어 교육 현장의 반발로 당초 계획을 2015년까지 완성하는 것으로 늦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예산 삭감을 핑계로 교육 현장 활동의 성과물을 모두 전자책으로 제작하는 정책을 꾸준히 입안하고 있다.

    ‘세계 최초’를 좋아하는 관료들이 입안한 이 정책에 대해 미국 ‘워싱턴포스트(WP)’가 3월 25일 한국 교육계 지도자들이 우려를 표명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게재했다. “스마트폰과 스마트패드(태블릿PC)에 익숙해진 세대가 디지털 교과서 도입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왜 다른 나라에서는 전자 교과서 도입을 서두르지 않을까. 우에무라 야시오 도쿄전기대학 출판국장은 ‘20년 후의 출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인터뷰에서 교과서를 전자화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구어체를 문어체로 바꿔 인용해보자.

    “엄밀히 따지면 지금의 수업 형태 안에서 현재 교과서를 그대로 전자화한다고 해도 쓸모없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현재 학교 교육의 수업 시스템은 고정적인 쪽수 개념을 가진 책을 바탕으로 성립됐다. 예를 들어 교사가 ‘35쪽 둘째 줄부터 읽어라’라고 말하면 모두 같은 콘텐츠를 찾을 수 있다. 인쇄 서적이 가져다준 습관에 익숙해진 것이다. 이것이 한 사람에 한 대씩 컴퓨터를 사용해서 하는 수업이 실패한 원인이다. 모두 눈앞에 있는 컴퓨터만 바라보게 되면 학생들은 교사와 눈을 맞출 수 없고 교사는 학생을 컨트롤할 수 없다. 교육은 교사가 칠판을 가리키면 학생 전원의 시선이 집중되는 그런 인간미까지 포함한다. 교과서도 그런 인간미 속에서 자리 잡히는 게 아닐까?”



    만약 교과서를 탑재한 단말기가 스마트패드라면 어떨까. 아이들은 교과서보다 더 재미있는 다른 곳에 접속해 혼자 즐길 확률이 높다. 이는 파워포인트를 이용한 수업 도중 학생들이 잠을 자도 지적할 수 없는 것보다 더 엉망인 환경이 조성되는 셈이다.

    초등학생 정도만 돼도 인류가 생산한 모든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은 맞다. 하지만 학생이 아무리 많은 정보를 검색하더라도 정보를 가공하고 판단하는 능력은 결코 키워지지 않는다. 학교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조성됐지만 ‘어떻게 배울 것인가’라는 방법론을 다시 가르쳐야만 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전자 교과서’로 수업하면 교실 엉망 된다
    조선시대 서당에서 천자문을 마르고 닳도록 외운 일이나 영어를 처음 배우는 학생이 기초적인 영어문장을 100번씩 쓰며 외우는 일의 유효성은 여전하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신체성’이다. 득도하려고 수도하는 승려처럼 온몸으로 체현해야만 비로소 정보가 지닌 가치를 제대로 깨우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교육당국자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다. 전자 교과서를 도입하면 초등교육은 완전 실패할 것이다. 그것을 교육 현장의 실무자들이 경고한다.

    1958년 출생.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학교도서관저널’ ‘기획회의’ 등 발행. 저서 ‘출판마케팅 입문’ ‘열정시대’ ‘20대, 컨셉력에 목숨 걸어라’ ‘베스트셀러 30년’ 등 다수.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