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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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의 철석같이 믿은 정조, 인삼 오용으로 죽음 불렀다

“열로 인한 종기에 열 더한 의료 사고 … 어의 결국 맞아 죽어”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前 대구한의대 교수

    입력2009-02-27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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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의 철석같이 믿은 정조, 인삼 오용으로 죽음 불렀다
    TV 드라마의 인기 때문인지 근래 몇 년간 개혁군주인 조선 정조에 대한 관심이 가히 폭발적이었다. 정조 독살설은 일부 역사학자와 소설가들이 주장한 이후, 이루지 못한 개혁의 상징이자 우리가 믿고 싶은 ‘비극의 신화’가 됐다. 필자는 지난해 6월 ‘주간동아’(639호)에 정조 독살설을 통박하는 글을 썼다. ‘모두가 그렇게 믿고 싶지만 진실은 사실로써 밝혀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필자는 정조의 죽음을 인삼 오용에 의한 의료사고라고 주장했다.

    최근 발견된 정조 어찰첩 때문에 독살설이 전면 부인되면서 그 글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어찰을 통해 독살설의 주체이던 노론벽파와 정조 사이의 갈등이 다른 각도에서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 소설가들은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언론에 정조 독살설을 더욱 강력하게 퍼뜨리고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정치적 추론이 아닌 의학적 관점에서 판단해야 옳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아직도 계속되는 독살설을 재반박하기 위해 정조의 사망일(1800년 6월28일) 전후의 급박했던 상황을 실록과 의학서에 기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재구성해봤다.

    심인이 쓴 수은 연훈방은 毒 아닌 藥

    어의 철석같이 믿은 정조, 인삼 오용으로 죽음 불렀다
    정조 독살설의 뿌리가 된 수은 함유 연훈(煙燻)방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정조 24년 6월23일. 정조는 6월14일 제조(提調) 서용보(徐龍輔·1757~1824)에게 종기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 이래 병의 진척이 없자 최후의 승부수를 던졌다. 변씨 의원과 장영장관(將營將官) 심인(沈)을 부른 것. 심인은 독살설의 주인공이자 정조 어찰의 상대방인 심환지(沈煥之·1730~1802)의 친척뻘이었고, 변씨는 저잣거리의 무명 의사였다. 정조는 이전에 저잣거리의 천민의사 피재길의 도움으로 고질병인 종기를 고친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변씨 같은 무명 의사를 과감하게 종기 치료에 투입했다.

    조선시대 왕에게 사용하는 치료법은 먼저 안전성이 확보돼야 했다. 기록에 따르면 몇 차례 임상실험 결과 변씨 의원과 심인의 토끼 가죽 치료법 및 연훈방은 안전성이 검증됐다. 기록은 “토끼 가죽은 신봉조가, 연훈방은 서정수가 효험을 보았다”고 전한다. 당시 어의(御醫)를 관리 감독하고 진료의 전 과정을 관장하는 도제조 이시수(李時秀·1745~1821)는 정조 사망 이틀 전인 6월26일 연훈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금 전 연훈방을 사용한 뒤 심인과 여러 의관이 모두 종기 부위가 어제보다 눈에 띄게 좋아져 며칠 지나지 않아 나머지 독도 없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 의관뿐 아니라 아침 연석에서 신들이 본 것으로도 어제보다 매우 좋아졌습니다.”

    연훈방을 쓰자 정조의 종기에 고여 있던 피고름이 한 바가지 빠져나와 이불과 옷을 모두 적신다. 이를 두고 ‘호전이냐 악화냐’라는 논쟁이 있었는데, 정조 24년 실록의 혜경궁 홍씨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피고름은 분명히 호전 증상임을 알 수 있다.

    “혜경궁 홍씨가 종기로 고생했는데, 며칠을 끌던 종기에서 많은 피고름이 나오면서 나았다.”

    연훈방은 수은을 태운 것으로 유해한 약물임이 틀림없다. 더욱이 정조 후대의 기록은 ‘연훈방을 세 번 사용했다’고 말하지만 당대 기록을 자세히 보면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연훈방을 쓴 뒤 임금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한 여러 약물들이 논의되는데, 한의학 이론에 밝았던 정조는 스스로 “이제는 열을 다스리는 약에 크게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몸의 열을 내리는 가미소요산(加味逍遙散)에 사물탕(四物湯)을 합방해 사용할 뜻을 내비친다.

    하지만 도제조 이시수는 이에 맞서 인삼이 들어간 경옥고(瓊玉膏)를 비롯해 육군자탕, 생맥산, 팔물탕을 추천한다. 모두 몸에 열을 더하는 약재였다. 특히 인삼이 든 경옥고의 사용에 대해선 어의 강명길(康命吉)의 강력한 추천이 곁들여진다. 결국 어의가 처방한 약을 먹은 정조의 병세는 눈에 띄게 악화된다. 이시수가 “어제 저녁에도 주무시는 듯 몽롱해 보이셨는데 간밤에 계속 그러하셨습니까”라고 묻자 정조는 “어젯밤의 일은 누누이 다 말하기 어렵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이후 정조의 증세는 급격히 악화됐고, 정조는 결국 숨을 거뒀다.

    어의 철석같이 믿은 정조, 인삼 오용으로 죽음 불렀다

    정조가 먹은 경옥고를 만들고 있다.

    종기는 현대적 의미로 ‘스트레스’

    정조를 죽음에 이르게 한 질환은 종기가 분명하다. 종기의 한의학적 명칭은 ‘옹저(癰疽)’. ‘동의보감’은 종기의 원인을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하거나 소갈병이 오래되면 반드시 옹저나 종창이 생긴다”고 지적한다. 현대적 의미로는 ‘스트레스’나 ‘화’가 그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정조 어찰은 열을 잘 받고 격정적인 그의 면모와 체질을 낱낱이 보여준다. ‘후레자식’ ‘젖비린내’ ‘분노로 새벽 5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편지를 쓴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또 “가슴속의 열기로 황련이라는 약을 물마시듯 했고 젊은 날 우황과 금은화 먹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고 술회했다. 열을 잘 받는 정조의 몸이 경옥고에 든 인삼 때문에 더 많은 열을 받았을 것은 불 보듯 자명한 이치.

    그렇다면 정조에게 인삼이 든 약물을 극구 권유한 어의 강명길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강명길은 1737년에 태어나 1801년에 죽었다. 33세에 내의원에 들어가 54세까지 20년간을 내의원에 종사했으며, 17년을 내의원의 수의(首醫)로 근무했다. 36세에 수의가 됐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사실 강명길은 정조가 임금이 되기 전부터 그의 건강을 보살폈다. 그는 정조의 체질적 특성을 잘 파악해 고암심신환과 가미소요산, 청심연자음을 처방했는데 이는 정조가 상복하고 극찬한 약물이다.

    특히 가미소요산은 의학 입문의 옹저편에 나오는 처방으로 부인의 갱년기에도 사용한다. 갱년기의 부인은 등에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며 찬물을 자꾸 들이켜게 된다. 정조의 해묵은 화병이 갱년기 증세와 비슷하다는 점을 파악한 강명길은 몸에 열을 내리는 가미소요산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다.

    ‘동의보감’에도 없는 약을 처방해 신기한 효험을 보자 정조는 강명길과 공동저작을 기획한다. 정조23년 완성된 ‘제중신편(濟衆新編)’이 바로 그 결과물. 정조는 편애에 가까울 정도로 어의 강명길을 감싸고돌았다. 당시 경기북부 어사였던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부평부사를 지낸 강명길의 죄상을 밝히고 그를 탄핵한다. 실제로 갖은 죄상이 드러났지만 정조는 그를 귀양 보내는 척하다가 한 달 후 어의로 복직시킨다.

    정조의 최후는 강명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의학에 관한 한 탁월한 이론가였던 정조는 누구보다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있었다. 종기가 번지게 된 원인이 인삼이 든 육화탕에 있음을 알고 누누이 인삼 사용을 강력히 피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평생 건강 처방인 가미소요산 합방 사물탕과 경옥고 사이에서 갈등한다. 결국 강명길의 추천이라는 말에 인삼이 든 경옥고를 복용한다.

    정조가 숨을 거둔 후 강명길은 ‘노륙(戮)형’에 처해진다. 그에게 가해진 노륙형은 자신은 극형에 처해지고 아들들은 외딴 섬에 보내지는 것. 그런데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바로 죽는다. 효종의 종기를 치료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현행범’ 신가기가 극형에 처해진 이후 최악의 형을 받은 셈이다. 정조의 신임 아래 어의 중 수의가 되고 ‘제중신편’을 저작하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리던 강명길은 마지막 순간 최악의 구렁으로 빠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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