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에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만 간다. 예전엔 강아지가 대세였는데, 요즈음은 아무래도 고양이 쪽으로 무게중심이 넘어간 듯하다. 내 주변만 보더라도 사촌 여동생부터 시작해 동료 작가, 학교 후배, 아파트 이웃 주민까지 너나없이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저 무시무시한 소설 ‘검은 고양이’를 필두로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 등장하는 고양이 이미지가 대체로 부정적이었던 걸 기억하면-그중 압권은 역시 ‘톰과 제리’다-격세지감이라는 단어가, 식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갑자기 고양이의 성향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이전에 없던 애교와 재롱이 눈에 띄게 늘었나? 애완동물로서의 소임과 사명에 충실해지자고 만국의 고양이들이 단결이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내가 만나본 고양이들은 여전히 애교와 재롱은커녕, 주인에 대한 예의나 충성심 따위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버릇없고 도도한 친구들뿐이었다. 한데도 사람들은 그런 고양이에 열광한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격세지감’이란 단어는 고양이에게 적용할 말이 아닌, 우리에게 대입해야 할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얼마만큼 변한 것일까? 고양이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애교, 충성심 없어도 사람들 열광
나는 먼저 사촌 여동생에게 물어보았다. 한 인터넷 쇼핑몰 업체에서 근무하는 사촌 여동생은 벌써 3년째 고양이와 원룸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다. 얼마 전엔 새로 검은 줄무늬가 그어진, 내가 보기엔 좀 험상궂게 생긴 고양이를 한 마리 더 입양했다.
“고양이? 아, 지긋지긋하지. 말도 더럽게 안 듣고, 성질도 더럽고, 또 돈도 많이 들고.”
밤늦은 시간, 휴대전화 너머 사촌 여동생은 정말 지겨운지 이따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강아지 같은 걸 키우면 되잖아? 왜 하필 고양이냐고?”
내 질문에 사촌 여동생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얼 키운다는 느낌은 별로 없고, 그냥 같이 산다는 느낌을 주는 거 같아. 음, 그러니까 내 말은… 애완동물이란 생각을 한 번도 들게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들어.”
사촌 여동생은 그러면서 예전 자신이 키웠던 강아지 얘기를 해주었다.
“오빠도 알겠지만, 내가 그 강아지 좀 이뻐했수? 한데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 강아지한텐 나를 ‘엄마, 엄마’라고 부르라 했는데, 고양이한텐 그게 ‘언니’로 바뀐 거야. 그게 무슨 차이인지 알겠어?”
나는 계속 ‘흠흠’거리면서 사촌 여동생의 말을 들었다. 휴대전화 너머에선 사촌 여동생 목소리 말고 계속 탁탁, 뭔가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어, 이거. 나 지금 생식 만들면서 전화 받는 거거든. 야옹이들 먹일 생식.”
사촌 여동생은 생닭에서 뼈와 살을 발라내, 그것을 다시 무슨무슨 영양제와 버무려 매주 고양이들에게 먹인다고 했다.
“나한텐 달걀 한번 삶아준 적 없는 놈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촌 여동생은 “어, 어, 물 끓는다” 하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나는 끊긴 휴대전화를 한동안 바라보며 흠흠, 알 수 없는 허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 다음 내가 고양이에 대해 물어본 사람은 앞집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아파트 단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아주머니는, 바로 고양이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는 종종 아파트 경비원들과 말싸움을 벌였다. 길고양이(우리가 흔히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는 고양이를 아주머니는 이렇게 부른다)에게 사료를 주려는 아주머니와 그것을 말리는 경비원 사이의 마찰이었다.
“아, 글쎄 안 된다니깐요! 가뜩이나 고양이 때문에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데…. 아, 그리고 쓰레기종량제 봉투, 아주머니가 치워요! 우리도 아주 환장하겠다고요!”
경비원들은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꿋꿋하게, 때론 몰래몰래 길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놓아주었다. 날씨가 추워지기라도 하는 날엔, 종종 발을 구르며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나와 걱정스럽게 놀이터나 화단을 바라보는 아주머니를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고양이들 때문에 피곤하진 않으세요?”
내 질문이 급작스러울 법도 했지만, 아주머니는 슬쩍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아마도 ‘고양이’라는 낱말 때문인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저기, 고양이의 매력이 뭘까요?”
나는 아주머니의 미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짧은 답을 내놓았다.
“우리랑 비슷한 거요.”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한 뒤 장바구니를 들고 저만치 앞서 걸어나갔다.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잡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강아지에서 고양이로, 도덕에서 윤리로
사람들이 고양이를 기르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테지만, 그래도 그 중심엔 아주머니가 말한 ‘우리랑 비슷한 거’란 기조가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강아지에게서 ‘우리랑 다른 것’을 보았다면, 고양이에게선 ‘우리랑 비슷한 거’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확대해보면, 우리 사회가 ‘도덕’에서 ‘윤리’로 넘어가는 과정이란 해석도 내놓을 수 있다(확대해석이라고 야유 보내고 있는 거 다 안다. 하지만 ‘침소봉대’와 ‘확대해석’이 내가 쓰는 글의 기조다). 도덕이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강제한 ‘습속’이라면, 윤리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행한 ‘명령’이다. ‘우리와 다른’ 강아지는 우리에게 ‘도덕’을 요구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고양이들은 ‘윤리’를 요구한다. 강아지에게서 고양이에게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은 바로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만약 그것이 맞다면 이 변화는 꽤 긍정적이다. 우리가 허울 좋은 도덕의 가면을 벗고 서서히 주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고양이들이 그것을 가속화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한데, 사실 조금 우려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내 주변에 고양이를 기르는 부부들은 하나같이 자식이 없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이걸 또 어떻게 봐야 할까 고민이다. 또다시 과대해석을 해보면, 주체가 주체에 지나치게 탐닉한 경우라고 봐야 할까? 그도 아니면 그냥 고양이의 매력 탓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고양이는 그저 단순한 동물만은 아닌 것 같다. 복잡하고도 미묘한, ‘톰’과도 같은.
갑자기 고양이의 성향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이전에 없던 애교와 재롱이 눈에 띄게 늘었나? 애완동물로서의 소임과 사명에 충실해지자고 만국의 고양이들이 단결이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내가 만나본 고양이들은 여전히 애교와 재롱은커녕, 주인에 대한 예의나 충성심 따위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버릇없고 도도한 친구들뿐이었다. 한데도 사람들은 그런 고양이에 열광한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한 ‘격세지감’이란 단어는 고양이에게 적용할 말이 아닌, 우리에게 대입해야 할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 얼마만큼 변한 것일까? 고양이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애교, 충성심 없어도 사람들 열광
나는 먼저 사촌 여동생에게 물어보았다. 한 인터넷 쇼핑몰 업체에서 근무하는 사촌 여동생은 벌써 3년째 고양이와 원룸에서 동고동락하고 있다. 얼마 전엔 새로 검은 줄무늬가 그어진, 내가 보기엔 좀 험상궂게 생긴 고양이를 한 마리 더 입양했다.
“고양이? 아, 지긋지긋하지. 말도 더럽게 안 듣고, 성질도 더럽고, 또 돈도 많이 들고.”
밤늦은 시간, 휴대전화 너머 사촌 여동생은 정말 지겨운지 이따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강아지 같은 걸 키우면 되잖아? 왜 하필 고양이냐고?”
내 질문에 사촌 여동생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얼 키운다는 느낌은 별로 없고, 그냥 같이 산다는 느낌을 주는 거 같아. 음, 그러니까 내 말은… 애완동물이란 생각을 한 번도 들게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게 마음에 들어.”
사촌 여동생은 그러면서 예전 자신이 키웠던 강아지 얘기를 해주었다.
“오빠도 알겠지만, 내가 그 강아지 좀 이뻐했수? 한데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 강아지한텐 나를 ‘엄마, 엄마’라고 부르라 했는데, 고양이한텐 그게 ‘언니’로 바뀐 거야. 그게 무슨 차이인지 알겠어?”
나는 계속 ‘흠흠’거리면서 사촌 여동생의 말을 들었다. 휴대전화 너머에선 사촌 여동생 목소리 말고 계속 탁탁, 뭔가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어, 이거. 나 지금 생식 만들면서 전화 받는 거거든. 야옹이들 먹일 생식.”
사촌 여동생은 생닭에서 뼈와 살을 발라내, 그것을 다시 무슨무슨 영양제와 버무려 매주 고양이들에게 먹인다고 했다.
“나한텐 달걀 한번 삶아준 적 없는 놈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촌 여동생은 “어, 어, 물 끓는다” 하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나는 끊긴 휴대전화를 한동안 바라보며 흠흠, 알 수 없는 허기 같은 것을 느꼈다.
그 다음 내가 고양이에 대해 물어본 사람은 앞집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아파트 단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아주머니는, 바로 고양이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는 종종 아파트 경비원들과 말싸움을 벌였다. 길고양이(우리가 흔히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는 고양이를 아주머니는 이렇게 부른다)에게 사료를 주려는 아주머니와 그것을 말리는 경비원 사이의 마찰이었다.
“아, 글쎄 안 된다니깐요! 가뜩이나 고양이 때문에 민원이 많이 들어오는데…. 아, 그리고 쓰레기종량제 봉투, 아주머니가 치워요! 우리도 아주 환장하겠다고요!”
경비원들은 아주머니에게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꿋꿋하게, 때론 몰래몰래 길고양이들에게 사료를 놓아주었다. 날씨가 추워지기라도 하는 날엔, 종종 발을 구르며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나와 걱정스럽게 놀이터나 화단을 바라보는 아주머니를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고양이들 때문에 피곤하진 않으세요?”
내 질문이 급작스러울 법도 했지만, 아주머니는 슬쩍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아마도 ‘고양이’라는 낱말 때문인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말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저기, 고양이의 매력이 뭘까요?”
나는 아주머니의 미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고 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우 짧은 답을 내놓았다.
“우리랑 비슷한 거요.”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한 뒤 장바구니를 들고 저만치 앞서 걸어나갔다.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잡지 않았다. 그것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강아지에서 고양이로, 도덕에서 윤리로
사람들이 고양이를 기르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테지만, 그래도 그 중심엔 아주머니가 말한 ‘우리랑 비슷한 거’란 기조가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강아지에게서 ‘우리랑 다른 것’을 보았다면, 고양이에게선 ‘우리랑 비슷한 거’를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확대해보면, 우리 사회가 ‘도덕’에서 ‘윤리’로 넘어가는 과정이란 해석도 내놓을 수 있다(확대해석이라고 야유 보내고 있는 거 다 안다. 하지만 ‘침소봉대’와 ‘확대해석’이 내가 쓰는 글의 기조다). 도덕이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강제한 ‘습속’이라면, 윤리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행한 ‘명령’이다. ‘우리와 다른’ 강아지는 우리에게 ‘도덕’을 요구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고양이들은 ‘윤리’를 요구한다. 강아지에게서 고양이에게로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은 바로 이런 변화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만약 그것이 맞다면 이 변화는 꽤 긍정적이다. 우리가 허울 좋은 도덕의 가면을 벗고 서서히 주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고양이들이 그것을 가속화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한데, 사실 조금 우려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내 주변에 고양이를 기르는 부부들은 하나같이 자식이 없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이걸 또 어떻게 봐야 할까 고민이다. 또다시 과대해석을 해보면, 주체가 주체에 지나치게 탐닉한 경우라고 봐야 할까? 그도 아니면 그냥 고양이의 매력 탓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고양이는 그저 단순한 동물만은 아닌 것 같다. 복잡하고도 미묘한, ‘톰’과도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