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프들이 술 마시는 맛에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영화 ‘낮술’에는 정말로 다양한 낮술의 상황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낮술의 장점을 아는 관객들이 열광할 수밖에요.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컵라면’을 선물로 받아 더 즐거운 영화 감상이었어요.
곰곰 생각해보니 매주 제 쇼핑 목록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아이템이 있었어요. 바로 소주입니다(약간 부끄러운). 소주는 한국인의 일상이지만, 지금 소주가 딱 맛이 올랐다는 건 분명합니다. 가을 전어, 겨울 굴이 ‘제철 음식’이듯 쇼핑에도 ‘제철 신상’이 있어요. 예를 들면 봄에 선글라스와 미백제품, 가을에 빅백이 있죠. 지금은 소주가 제철이고요.
어려서 즐겨 먹던 과자 회사 롯데는 소주 ‘처음처럼’을 손에 넣음으로써 평생을 함께하게 되나봐요. 롯데소주 되기 전에 ‘처음처럼’을 많이 마셔둬야죠.
또 로또보다 훨씬 당첨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며 소주 병뚜껑을 따왔는데, 소주 회사가 상금이 인쇄된 소주들을 별도로 유통해왔다니까 바보 된 기분입니다. 소비자의 비난이 쏟아졌으니 앞으로는 10병 따면 ‘한 병 더’ 정도는 나와주지 않을까요?
그리고 영화 ‘낮술’도 있잖아요. 제작비 1000만원이 들었고, 그중 반은 술값에 썼다는 영화. 다른 영화 앞뒤에 끼여 아침, 저녁으로만 상영해서 개봉 열흘 만에 1만명을 동원했다는 그 영화 말이에요. 이 영화 보고 나와서 소주 마시러 가지 않았다는 사람, 아직 못 봤어요.
영화에는 한국에서 소주를 마시게 되는 거의 모든 상황이 등장하고, 술 좀 마셔본 사람들은 다 겪은 에피소드들이 나옵니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내 소극장에서 봤는데, 최근 몇 년 동안 이렇게 ‘인터랙티브’한 영화는 처음이었답니다. 아주 사소한 대사, 예를 들면 구멍가게에서 산 싸구려 양주를 종이컵에 콸콸 부으며 “자꾸 따르려면 귀찮아”라고 중얼거리는데, 관객들이 아주 좋아 죽죠. 제 앞에 ‘내공’ 좀 있어 보이는 남성 관객은 술과 핸드메이드 마른안주 세트를 싸와서 상영 시간 내내 마셨어요. 눈총이요? 아니, 다들 부러워했죠.
겨울바다, 그리고 컵라면에 소주 한 잔. 보통의 사람들이 한 번씩 꿈꿔본 시추에이션이죠. 잭 니콜슨이 나온 영화 제목식으로 얘기하면 한국인이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버킷 리스트’일 겁니다. 겨울바다, 컵라면, 소주 3개의 키워드로 만드는 ‘상상화’는 젊음과 낭만적 우울, 치기가 뒤섞여 피카소의 ‘청색시대’ 회화와도 비슷할 것 같죠?
영화 주인공 혁진도 우여곡절 끝에 ‘그걸’ 해봅니다. 하지만 콘셉트와 현실이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죠. 겨울 바닷바람은 살을 베어갈 듯하죠, 바다는 1분만 보면 지루하죠, 기름 뜬 컵라면에선 모래도 씹힙니다. 매일 폭음한 위는 소주를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젊어서 사서 하는 고생치고 아주 ‘찌질’하죠.
‘낮술’의 주인공들은 술광고처럼 맛있게 술을 마시지 않아요. 반대로 한국에서 술이란,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며 자기 파괴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지긋지긋한 저놈의 소주, 토 나와. 그래도 마시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걸 감독도 관객도 잘 아는 거죠.
다들 알다시피 주변의 강요에 못 이겨, 술 권한 상대가 무안할까봐, 혹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어떻게 해볼 기회를 찾을 욕심에 일단 한 잔 넘기면, 그 다음부터 술을 마시는 건 내가 아니라 술이니까요.
술 마셔야 할 이유 많고, 기회 많고, 절박하기로는 우리나라가 최고 수준일 겁니다. 그래도 이날은 오랜만에 소주 마시며 젊은 인디 아티스트들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2008년 1인당 평균 소주소비량 72.5병, 올해는 모두들 쉽게 넘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