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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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포르투갈의 침략 … 지금은 서구자본의 눈치

  • 이명재/ 자유기고가 minho1627@kornet.net

    입력2003-08-07 17: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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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포르투갈의 침략 … 지금은 서구자본의 눈치
    “나는 나와 나의 창작작업에 이처럼 아늑한 휴식의 장소를 제공해준 이 ‘훌륭한 나라’에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린다. 날을 거듭할수록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즘을 피해 이국을 떠돌던 독일의 유대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마음의 안정을 찾은 이 ‘훌륭한 나라’는 브라질이다. 1942년 부인과 함께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그의 유서는 자신에게 안식을 준 브라질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나의 정신적 고향인 유럽이 자멸해버린 뒤에 내 인생을 다시 근본적으로 새롭게 일구기에는 이 나라만큼 호감가는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츠바이크가 이렇듯 찬사를 바친 브라질이지만 이 나라의 현실은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다. 극심한 빈부격차에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등 이른바 남미병이 브라질을 20년 가까이 괴롭히고 있다.

    출구가 없어 보이던 이 나라에는 그러나 지금 새로운 희망이 보이고 있다. 그 희망의 구심점은 브라질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 룰라다. 얼마 전 그의 연설 장면을 내보내는 TV 카메라는 몇 번이고 그의 왼손을 클로즈업했는데, 그건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간 왼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0대 때 프레스공으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한 흔적이다. 새끼손가락이 잘린 손을 열정적으로 내저으며 연설하는 대통령, 그에 환호하는 브라질 국민들의 모습은 노동자 출신 대통령이 불어넣고 있는 새로운 기운을 보여줬다.

    룰라는 브라질 국민들뿐만 아니라 외국, 특히 서구 언론한테도 스타로 대접받고 있다. 지주와 군부 출신이 정치적 상류층을 형성해온 브라질에서 빈민가에서 나고 자란 프레스공 출신의 룰라가 매우 특이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서구 언론이 룰라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즉 그동안 죽 좌파 노선을 걸어온 룰라가 당선 후에 친노(親勞)정책을 포기하는 과감한 변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자본과 언론은 선거 전만 해도 “룰라가 당선되면 브라질은 파산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나 집권 후 룰라가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노조에 메스를 대는 등 급히 ‘우향우’한 듯한 행보를 보이자 우려의 목소리는 금세 찬사로 바뀌었다. 룰라의 변모는 그러나 사실 ‘전향’이라기보다는 브라질의 경제상황에서 비롯된 현실주의 노선인 측면이 크다. 철저히 외국 자본의 입김에 좌우되는 경제구조상 서구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브라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남미의 맹주인 브라질 대통령이 미국으로 날아가 자신을 의구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부시와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에게 자신은 과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입증해야 하는 현실, 그건 바로 브라질뿐만 아니라 남미의 현주소다. 남미 경제가 1980년대 이후 번갈아가며 위기에 빠지고, 살아나는가 싶다가도 다시 고꾸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이른바 ‘종속과 정체’로 요약될 수 있는 남미 경제의 근본적 한계 탓이다. 그 한계는 무엇보다 오랜 식민통치가 구조화해 놓은 역사의 기록이다.

    1986년에 나온 영화 ‘미션’(사진)은 수도사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종의 종교영화였지만 그 이면에는 브라질(남미)의 슬픈 역사가 배경처럼 흐르고 있다. 18세기 브라질을 무대로 포르투갈의 침략을 맞아 상반되는 태도를 취한 예수교 수도사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의 제목 ‘미션(mission)’은 ‘선교’ ‘사명’이라는 뜻이다. 침략자든 거기에 맞선 수도사든 그 내용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브라질은 정복, 선교해야 할 미개의 땅, 주체가 아닌 객체였다. 그 주객이 전도된 관계는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식민지에서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자기완결적인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대외 의존형 경제, 한 나라라고 하기 곤란할 정도로 하늘과 땅 차이인 빈부간 계층 갈등. 그건 남미 나라들이 공유하는 단면도다.

    브라질의 많은 학자들은 이 같은 간단치 않은 현실 상황 속에서 집권한 룰라이기에 그의 현실적 노선을 이해하면서도 점차 노동자당 출신다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룰라는 이미 미국의 미주자유무역지대 확대 시도에 맞서 남미경제공동체 구축을 꾀하고 있다. 룰라의 ‘미션’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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