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듯하게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이대우 씨 부부.
9년 전 월급쟁이 생활을 접고 아내와 단 둘이 해발 700m가 넘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흥정계곡으로 들어와 새, 나무, 바람, 꽃들과 어울려 새집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이대우(62) 씨. 그는 2년 전 국내 최초로 새집 전시회를 열고, 전시 작품의 사진과 시골생활 경험들을 엮어 ‘새들아, 집 지어줄게 놀러 오렴’이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냈다. 이름도 지위도 훌훌 털고 주류에서 벗어나 ‘마이너리티(minority)’의 삶을 즐기려던 그의 희망은 그런 결실 덕에 도시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됐다.
“원래 목공 일에 관심이 많아 처음엔 책꽂이, 선반, 벤치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었어요. 두 해쯤 지나 아침저녁으로 변하는 시골 풍광에 익숙해질 무렵, 집 주위로 날아드는 온갖 종류의 새들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겨울이면 추위 속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새들이 종종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새집과 먹이집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 씨 부부가 사는 29평 통나무집 베란다 난간은 수십 채의 새집과 먹이집 차지다. 숲 속의 빈집을 여럿 두고 꼭 집 다툼을 하는 녀석들이 있다. “언젠가 박새 수놈 한 마리가 새집을 탐색한 뒤 암놈을 데려와 둥지를 틀었어요. 그런데 곤줄박이가 끈질기게 훼방을 놓더니 결국 박새들을 쫓아내고 보금자리를 뺏었어요. 다람쥐가 새집을 차지하고 살기도 하죠.”
29평 통나무집 베란다 난간은 새들의 차지
아내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목수님’으로 불리는 것을 즐기는 이 씨는 새집 짓는 틈틈이 의자나 선반 같은 소품을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좋아한다. 예전 같으면 버리고 말 집 안의 망가진 물건도 손수 고쳐 쓴다. 도시 아파트 생활에선 꿈도 못 꾸던 즐거움이다. 조바심과 집착,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주류에서 한 발 비켜나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서 남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씨는 경기중·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합동통신 외신기자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대기업 임원, 해운업체 대표, 벤처기업 임원으로 이어진 직장생활에서 항상 ‘마이너리티’였다고 했다. 사소한 부정쯤은 은근슬쩍 눈감아주는 융통성,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어물쩍 넘어가는 성격이 결코 못 되는 원칙주의자였던 탓에 직장생활은 힘겨울 때가 많았다. 젊은 시절, 아내는 남편이 어느 날부터 책을 자꾸 사들이기 시작하면 겁부터 났다고 했다. ‘또 직장을 그만둘 때가 됐나보다’라는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이 씨는 “책을 사서 읽는 것이 가장 경제적으로 낭인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고 고백한다.
농대를 나와 농사를 지을까, 미대에 진학해 화가가 될까, 꿈이 많던 고3 시절.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당시 검찰총장이던 부친이 군부에 잡혀가고 가족은 두 달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화가와 농장주의 꿈은 한순간 날아갔고, 오로지 공부에 매달렸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한 뒤 아이스하키 국가대표를 하는 등 사법시험 공부에 열을 올리는 주류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한 발짝 비켜나 있었다.
시골생활 하려면 발상부터 전환해야
이대우 씨가 만든 새집은 500채가 넘는다.
“흥정계곡을 본 뒤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결정을 순식간에 해버렸어요. 땅 매입비나 집 지을 자금 준비도 없이 덜컥 일을 저지른 거죠. 10년 넘게 살던 서울의 아파트를 급히 처분해 작은 평수로 옮기고 남은 돈을 챙겨 이곳에 들어왔어요. 땅 욕심이 없다 보니 자그만 집터 외에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살면서 작업실과 텃밭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에요.”
2년 전 130여 채나 되는 새집을 가지고 전시회를 연다고 하자 대단한 화제가 됐다. ‘새로 지은 집’을 한꺼번에 전시한다고 이 입, 저 입으로 전해졌으니 부부는 졸지에 엄청난 부자에다 대단한 사업가로 둔갑했다. 하지만 이는 유쾌한 해프닝이었을 뿐, 부부에게 따로 돈벌이는 없다. 슬하에 무남독녀 하나만 둔 탓에 늦은 나이까지 뒷바라지할 자식이 없었던 부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시골 생활을 결심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북아트를 전공한 딸은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싱가포르에 살고 있다.
이 씨 부부의 생활비는 한 달에 100만원 안쪽. “적은 돈으로 꿈꾸던 목공 일을 하고, 큰 개를 끌고 시골길을 산책했으면 하던 바람도 이뤘습니다. 아내도 전축의 볼륨을 한껏 올린 채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자수를 놓고 싶다던 소망을 이뤘지요. 가끔 친구들을 불러 테라스에서 차 한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일도 즐겁습니다.”
이 씨의 집은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과 새집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의 발길이 잦다. 마음은 있지만 그들이 선뜻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산수 좋고 개울을 낀, 나중에 땅값이 오를 곳을 골라 근사한 집을 짓고 살 꿈에 부풀어 있으니 돈도 많이 들 것 같아 망설이는 거죠. 시골 생활을 하려면 발상부터 전환해야 합니다. 평당 10만원의 땅엔 10만원짜리 집을 지어야지, 안 그러면 관리하느라 지쳐요. 산골은 1년의 반이 겨울이라 난방비만 해도 엄청납니다. 새 삶을 위한 세부적인 생활 정보와 계획 없이 무턱대고 시골 생활을 시작하면 오래 버티기 어려워요. 요즘 사람들은 노후의 경제력에만 관심을 쏟는데, 실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 씨는 서울을 떠나올 때 살림살이 절반을 버렸고 각종 모임도 버렸다. 남들에게 잊히는 게 두려우면 시골 생활은 견디기 어렵다. 지난여름 수해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부부는 시골 생활의 어려움을 톡톡히 절감했다. 전기와 전화, 수돗물까지 끊겨 빗물로 세수하며 밤마다 촛불로 어둠을 견뎠다.
벤처기업에서 일할 때 노후를 대비해 이 씨가 사둔 회사 주식은 퇴사 후 5년이 채 못 되어 휴지조각이 됐다. IMF 외환위기로 회사가 부도를 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아내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비웠다. 항상 모자란 듯하게 사는 것, 더도 덜도 아닌 그만큼으로 만족하게 사는 것이 인생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 아내가 웃으면서 묻는다. “남들이 돈 벌 동안 우린 뭐 했지?” 이 씨도 역시 웃음으로 답한다. “새집을 500채 이상 지어 모두 공짜로 나눠줬으니 대성공을 한 거고, 우리가 더 부자 아닌가. 마음의 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