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악기 제조회사 홍보팀 이 과장. 자신의 지식과 판단만 믿으며 주위에서 뭐라 하든 아랑곳 않는 ‘추진력’으로 유명하다.
“언제 한 번이라도 내 말 귀담아들어본 적 있느냐”고 항의하다 지친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어린 아들은 말을 못 알아듣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다.
회사는 구조조정의 격랑에 휘말리지만, 약빠르게 실세의 편에 선 그에겐 대리점 개설권이라는 보상이 주어졌다. 문제가 터진 건 대리점 오픈 당일. 이 과장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다 갑자기 쓰러지고, 오픈 행사는 엉망이 된다.
병원에 실려간 그는 뇌에서 청신경을 압박해 소리를 못 듣게 하는 종양이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선고를 듣는다. ‘마음을 얻는 지혜, 경청’은 이렇게 남의 말을 들을 줄 몰랐던 30대 후반 직장인에게 닥친 청천벽력 같은 청각의 상실과 뒤늦게 찾은 ‘각성’을 그리고 있다.
2007년 나온 이 책은 아직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내린다. 우리 모두 주위에서, 어쩌면 자신의 모습에서 조금씩 이 과장의 모습을 발견하고 불안에 시달리기 때문 아닐까. 말 잘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 현란한 수사를 구사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살아가지만, 그러다 한순간에 기우뚱 추락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말이다.
하나인 입이 두 개인 귀를 죽일 때
‘탈무드’는 입이 하나인데 귀가 두 개인 것은 말보다 듣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현들이 이구동성 말을 잘하기보다 잘 들으라고 강조한 것은 그걸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은 탓이리라.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은 “입은 상대적으로 경영하기 수월한 반면 눈과 귀는 적극적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통제가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말은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일단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귀담아듣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가 숨가쁘게 쏟아지는 요즘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혼자 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프로들끼리 공동작업을 통해 집단지성을 쏟아내도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까 말까다. 그런데 이 프로들이 하나같이 너무 잘난 사람들이라는 게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언호 전무는 “‘핵심 인재’가 강조되고 다들 ‘튀어야 산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말이 많아지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현상이 생긴다”고 진단했다. 하나인 입이 두 개인 귀를 죽일 때, 우리는 똑똑한 인재로 인정받기는커녕 세상의 숨가쁜 흐름에서 이 과장처럼 낙오해버릴지도 모른다.
귀는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
뉴욕 번화가를 지나던 한 인디언이 갑자기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 주변의 뉴요커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떨어뜨렸다. 지나가던 뉴요커들이 일제히 돌아봤다. 미국의 작가이자 연설가인 팀 한셀이 소개하는 이 일화는 듣기의 속성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 귀가 객관적이라고 자부하지만 듣고 싶은 것만 걸러내 듣는 ‘필터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
구 소장은 “이런 필터링은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일수록 더 많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상하관계가 분명한 조직에서는 경영자나 상사가 입맛에 맞지 않는 부하의 얘기에까지 귀 기울이는 성가심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대답 없는 메아리일 걸 알기에 부하들도 입을 닫는다. 젊은 아이디어들은 사장되고, 창의성과 열정은 시들며, 소통은 고사한다.
원활한 듣기를 가로막는 또 다른 훼방꾼은 예단과 두려움이다. 하지현 건국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귀 기울여 들어봤자 결론이 뻔하다고 지레짐작해버리면 더 이상 상대방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진다”면서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끝까지 듣지 않고 빨리 결론 내거나 넘겨짚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소리가 아닌 마음을 들어라
듣기를 방해하는 지레짐작 가운데서도 파괴적인 것 중 하나가 상대방이 나를 공격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사이 나쁜 부부간에 흔히 발견되는 기류다. 공격받을 게 뻔하다고 생각되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스스로를 방어하려 똑같이 공격의 칼날을 세우게 된다. 남는 것은 공격의 악순환뿐이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서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쌓아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말 밑에 감춰진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다. 이성희 우석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아이가 떼를 쓰거나 엇나가는 행동을 할 때 그 표면적인 말이나 행동에만 집착하면 부모가 먼저 지칠 수밖에 없다”면서 “아이가 내뱉는 말의 밑바닥에 깔린 동기나 좌절된 욕구, 감정 등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가 엄마를 비난할 때 그 말에만 좌우돼 감정을 상하지 말고 감춰져 있는 아이의 좌절된 욕구를 들어주라는 것. 제대로 된 듣기란 상대방의 말 너머 마음을 읽는 기술인 셈이다. 상대방의 진의에 귀 기울이며, 듣는 이가 말하는 이에게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해 말해주는 기법을 ‘공감적 경청’이라고 한다. 한 지방대학 총장은 어느 날 어렵게 영입한 미국 유학파 여교수가 들고 온 사표에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놀라움을 감추고 차분히 여교수의 얘기를 들어줬다. 여교수는 한국 교수사회에서 남성들의 협조를 얻어가며 일처리를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간 속으로만 삭인 고충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았다. 공감적 경청을 한 지 3시간 만에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여교수는 사표를 철회했다.
홍정수 한국리더십센터 전문위원은 “CEO 대상 강좌의 뒤풀이 자리에서 총장으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공감적 경청의 위력을 이렇게 정리했다.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행위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결된다. 대인관계의 예술이다.”
공감하려면 관용하고 포용하라
홍 전문위원은 “공감적 경청의 성패는 상대방에게 감정이입하는 듣는 이의 능력과 품성에 달렸다”고 말했다. 잘 듣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인격수련과 훈련이 필요한 셈이다. 구 소장은 특히 마음을 읽고 공감해 건설적 대화로 이끄는 듣기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관용적 듣기’와 포용의 회복이라고 지적한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어떤 제국이든 전성기 때 가장 눈에 띄는 미덕은 관용이었다. 정말 강한 제국은 피지배 민족의 문화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풍습을 용인했다.”
힘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의 소리를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힘든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권력과 지배력을 가진 이들이 관용적 듣기로 귀를 열 때 그 효력은 배가 된다. 이는 가정, 조직, 기업, 국가 어디에나 마찬가지다. ‘잘 들어주는 것’은 막혔던 혈관 구석구석까지 소통의 생혈을 흐르게 해 조직에 활기와 열정을 되찾아주는 묘약이다.
“언제 한 번이라도 내 말 귀담아들어본 적 있느냐”고 항의하다 지친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어린 아들은 말을 못 알아듣는 발달장애를 앓고 있다.
회사는 구조조정의 격랑에 휘말리지만, 약빠르게 실세의 편에 선 그에겐 대리점 개설권이라는 보상이 주어졌다. 문제가 터진 건 대리점 오픈 당일. 이 과장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다 갑자기 쓰러지고, 오픈 행사는 엉망이 된다.
병원에 실려간 그는 뇌에서 청신경을 압박해 소리를 못 듣게 하는 종양이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선고를 듣는다. ‘마음을 얻는 지혜, 경청’은 이렇게 남의 말을 들을 줄 몰랐던 30대 후반 직장인에게 닥친 청천벽력 같은 청각의 상실과 뒤늦게 찾은 ‘각성’을 그리고 있다.
2007년 나온 이 책은 아직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내린다. 우리 모두 주위에서, 어쩌면 자신의 모습에서 조금씩 이 과장의 모습을 발견하고 불안에 시달리기 때문 아닐까. 말 잘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시대, 현란한 수사를 구사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살아가지만, 그러다 한순간에 기우뚱 추락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말이다.
하나인 입이 두 개인 귀를 죽일 때
‘탈무드’는 입이 하나인데 귀가 두 개인 것은 말보다 듣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현들이 이구동성 말을 잘하기보다 잘 들으라고 강조한 것은 그걸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은 탓이리라.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은 “입은 상대적으로 경영하기 수월한 반면 눈과 귀는 적극적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통제가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말은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일단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귀담아듣기 위해서는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보가 숨가쁘게 쏟아지는 요즘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혼자 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프로들끼리 공동작업을 통해 집단지성을 쏟아내도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까 말까다. 그런데 이 프로들이 하나같이 너무 잘난 사람들이라는 게 오히려 발목을 잡는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언호 전무는 “‘핵심 인재’가 강조되고 다들 ‘튀어야 산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말이 많아지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현상이 생긴다”고 진단했다. 하나인 입이 두 개인 귀를 죽일 때, 우리는 똑똑한 인재로 인정받기는커녕 세상의 숨가쁜 흐름에서 이 과장처럼 낙오해버릴지도 모른다.
귀는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
뉴욕 번화가를 지나던 한 인디언이 갑자기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 주변의 뉴요커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떨어뜨렸다. 지나가던 뉴요커들이 일제히 돌아봤다. 미국의 작가이자 연설가인 팀 한셀이 소개하는 이 일화는 듣기의 속성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 귀가 객관적이라고 자부하지만 듣고 싶은 것만 걸러내 듣는 ‘필터인 경우가 더 많다는 것.
구 소장은 “이런 필터링은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일수록 더 많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상하관계가 분명한 조직에서는 경영자나 상사가 입맛에 맞지 않는 부하의 얘기에까지 귀 기울이는 성가심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대답 없는 메아리일 걸 알기에 부하들도 입을 닫는다. 젊은 아이디어들은 사장되고, 창의성과 열정은 시들며, 소통은 고사한다.
원활한 듣기를 가로막는 또 다른 훼방꾼은 예단과 두려움이다. 하지현 건국대 신경정신과 교수는 “귀 기울여 들어봤자 결론이 뻔하다고 지레짐작해버리면 더 이상 상대방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어진다”면서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끝까지 듣지 않고 빨리 결론 내거나 넘겨짚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소리가 아닌 마음을 들어라
듣기를 방해하는 지레짐작 가운데서도 파괴적인 것 중 하나가 상대방이 나를 공격할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사이 나쁜 부부간에 흔히 발견되는 기류다. 공격받을 게 뻔하다고 생각되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스스로를 방어하려 똑같이 공격의 칼날을 세우게 된다. 남는 것은 공격의 악순환뿐이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서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쌓아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말 밑에 감춰진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는 노력이다. 이성희 우석대 아동복지학과 교수는 “아이가 떼를 쓰거나 엇나가는 행동을 할 때 그 표면적인 말이나 행동에만 집착하면 부모가 먼저 지칠 수밖에 없다”면서 “아이가 내뱉는 말의 밑바닥에 깔린 동기나 좌절된 욕구, 감정 등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가 엄마를 비난할 때 그 말에만 좌우돼 감정을 상하지 말고 감춰져 있는 아이의 좌절된 욕구를 들어주라는 것. 제대로 된 듣기란 상대방의 말 너머 마음을 읽는 기술인 셈이다. 상대방의 진의에 귀 기울이며, 듣는 이가 말하는 이에게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해 말해주는 기법을 ‘공감적 경청’이라고 한다. 한 지방대학 총장은 어느 날 어렵게 영입한 미국 유학파 여교수가 들고 온 사표에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놀라움을 감추고 차분히 여교수의 얘기를 들어줬다. 여교수는 한국 교수사회에서 남성들의 협조를 얻어가며 일처리를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그간 속으로만 삭인 고충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았다. 공감적 경청을 한 지 3시간 만에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여교수는 사표를 철회했다.
홍정수 한국리더십센터 전문위원은 “CEO 대상 강좌의 뒤풀이 자리에서 총장으로부터 들은 얘기”라며 공감적 경청의 위력을 이렇게 정리했다.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행위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상당 부분이 해결된다. 대인관계의 예술이다.”
공감하려면 관용하고 포용하라
홍 전문위원은 “공감적 경청의 성패는 상대방에게 감정이입하는 듣는 이의 능력과 품성에 달렸다”고 말했다. 잘 듣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인격수련과 훈련이 필요한 셈이다. 구 소장은 특히 마음을 읽고 공감해 건설적 대화로 이끄는 듣기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관용적 듣기’와 포용의 회복이라고 지적한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어떤 제국이든 전성기 때 가장 눈에 띄는 미덕은 관용이었다. 정말 강한 제국은 피지배 민족의 문화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풍습을 용인했다.”
힘 있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의 소리를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힘든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권력과 지배력을 가진 이들이 관용적 듣기로 귀를 열 때 그 효력은 배가 된다. 이는 가정, 조직, 기업, 국가 어디에나 마찬가지다. ‘잘 들어주는 것’은 막혔던 혈관 구석구석까지 소통의 생혈을 흐르게 해 조직에 활기와 열정을 되찾아주는 묘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