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강좌를 잡기 위한 경쟁은 수강신청 ‘전쟁’ 을 불러일으킨다.
일단 시작되면 재빨리 컴퓨터 자판의 Ctrl+C(복사)와 Ctrl+V(붙여넣기) 키를 이용해 수강신청을 해야 한다. 하나만 틀려도 다시 고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초. 그 사이에 승패는 결정된다. 부르르. 방학이라 지방에 내려간 김씨의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혹시 나 늦으면 대신 해줘. 지방이라 불안해. 아이디 : ○○○○, 비밀번호 : XXXX.’
같은 시각, 한국대 중앙전산원 시스템관리 담당 이나라 씨는 수강신청 프로그램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보름 전 수강신청 프로그램과 학교 서버를 점검하고 가상 수강신청까지 마친 상태다. 잠시 후 수강신청이 시작되면 급격히 증가할 트래픽에 대비해 모든 시스템을 최적화해놓아야 했다. 어제부터 밤을 새운 동료들이 비상근무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오전 6시50분. 이씨와 동료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2. 오전 6시58분. 2분이 남았지만 김씨는 3대의 컴퓨터를 번갈아가며 접속을 시도했다. 6시59분50초… 58, 59초, 마침내 7시. 학교 서버가 열렸다. 김씨는 3대의 컴퓨터로 광클(빛의 속도로 빠르게 클릭하는 것)하며 수강신청 사이트에 접속을 시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익스플로러 창은 하얗게 먹통이다.
‘요청하신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 김씨는 계속 ‘새로 고침’을 누르며 접속을 시도했다. 10여 분이 지나자 한 컴퓨터가 힘겹게 접속에 성공했다. 번개처럼 메모장에 적어둔 강좌번호를 붙여넣었다. 하지만 ‘해당 강좌의 수강정원이 다 찼습니다’란 문구만 떴다. 혈압 상승. 서둘러 다른 강좌를 검색했다. 그렇게 20여 분간의 전쟁 뒤 수강신청이 끝났다. 안도의 한숨을 쉴 때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이번 학기 망했어. ㅠ.ㅠ 하나도 못 넣었어.’
한두 달 전부터 강좌 탐색전 돌입
같은 시각, 1만명이 넘는 인원이 동시에 학교 서버에 접속을 시도하자 트래픽 증가를 알리는 불빛이 쉴 새 없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기기에서 삑삑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모니터에는 접속량을 나타내는 붉은 그래프가 치솟았다. 몇 분이 지나자 사무실 여기저기서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지방인데 접속이 안 된다” “수강신청 페이지가 왜 안 뜨냐?” “혹시 서버가 다운된 게 아니냐?” 등 비상근무 중이던 전산 상담팀 직원들이 학생들의 항의전화를 받느라 정신없다. 두 시간쯤 지나서야 전화벨 소리가 잦아들고 트래픽이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접속량은 평소 수준을 되찾으며 빗발치던 항의전화도 멈췄다.
매 학기가 시작되기 전, 대학가는 총성 없는 전쟁에 돌입한다. 종이나 OMR카드로 하던 수강신청이 인터넷 선착순 방식으로 바뀐 이후 대학생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학교 서버에 접속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학교와 가까울수록 서버 접속이 빠르다’는 속설 때문에 수강신청 전날 밤부터 학교 근처 PC방에서 밤을 새우는 것은 기본. 컴퓨터 서너 대를 동시에 켜놓고 접속을 시도하기도 한다. 학교 전산실에 자리를 맡기 위해 새벽에 등교하거나, 기숙사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하는 경우도 많다. 대학생 박모(22) 씨는 “전공만 여섯 강좌를 들으려 했는데 ‘설마 전공에 사람이 몰릴까’ 해서 9시쯤 접속했더니 이미 다 차 있더라”며 울상을 지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각 학교는 서버를 증설하고, 학년마다 쿼터제를 실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여전히 수강신청 날이면 접속이 폭주한다. 매 학기 대학생들에게 수강신청은 가장 신경이 곤두서는 일로 손꼽힌다.
이 모든 현상은 이른바 ‘인기 강좌’를 잡기 위한 경쟁이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인기 있는 강좌와 그렇지 않은 강좌가 소문을 통해 퍼진 상태다. 인기 강좌란 ‘재미있고, 학점 따기 쉬우며, 취업에 도움이 되는’ 3박자를 갖춘 강좌를 말한다. 최근에는 민법, 형법, 미시·거시경제학처럼 ‘고시에 도움이 되는 강좌’가 인기 강좌의 반열에 올라 있다.
정원 못 채운 비인기 강좌 폐강 속출
수강신청 한두 달 전부터 학생들은 강좌 정보를 얻기 위해 치열한 탐색전을 펼친다. 각 대학의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이른바 ‘강추(강력하게 추천하는) 강좌’와 ‘비추(추천하지 않는) 강좌’ 리스트가 올라와 있다.
‘(추천) 문학과 철학~~’ ‘(추천) 계절학기 선택교양 강력 추천 강좌입니다’ ‘(비추천) 유럽 여행과 문학(○○○ 교수님) 절대 비추천’ ‘(비추천) 동서양 언어예절문화 듣지 마셈’.(서울 K대학 인터넷 게시판)
같은 게시판에 어떤 학생은 ‘전공 평점이 2.8 미만이었지만 총평점 3.0을 넘게 해준 사랑하는 강좌들을 공개한다’면서 자신이 수강한 교양강좌 리스트를 올려놓기도 했다. 말 그대로 ‘A+ 폭격을 받을 수 있는 강좌’라는 것이다.
반면 이런 경쟁의 뒤편에는 정원을 채우지 못해 폐강하는 강좌들도 있다. 서울 모 국립대의 경우, 매 학기 정원을 채우지 못해 폐강하는 강좌가 10개를 넘는다. 2008년 2학기 한 경제학 강좌는 ‘교수가 학점을 잘 주지 않아 전공 진입에 피해를 입는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결국 150명 정원에 10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신청해 강좌 자체가 없어졌다.
수강신청 실패는 ‘인기 강좌’를 차지하기 위한 강좌 매매로까지 이어진다. 인기 강좌를 선점한 몇몇 학생이 이를 필요로 하는 학생들에게 돈을 받고 강좌를 넘기는 것. 이들은 일시를 정한 후 강좌를 팔려는 학생이 그 시간에 온라인에서 강좌 신청을 취소하면, 사려는 학생이 재빨리 그 여석을 차지하는 방법으로 강좌를 매매한다.
취업이나 유학에 학점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 갖가지 부작용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과열된 수강신청 경쟁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1980, 90년대 대학에 다녔던 사람 중에는 이러한 세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과거에는 동기들끼리 다 같이 모여서 수강신청을 했습니다. 과대표가 수강신청 용지를 나눠주면, 같은 과 친구들은 거의 똑같은 강좌를 표시해서 냈습니다. 전공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선택과목도 다 같이 듣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말 듣고 싶은 강좌가 있으면 ‘도강’을 했죠. 학점이 안 나와도 교수님이 좋아서 들은 셈입니다. 수강신청 때문에 경쟁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중앙대 84학번 오유미 씨)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수강신청에 대해 대학들이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대학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왔다. 예를 들어 서울대는 학생들의 수요가 많은 강좌는 대형 강의실로 옮겨 정원을 늘리거나 강좌 수를 늘리기도 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사전 수요조사 방식을 통해 미리 수요를 파악한 후 그에 맞게 강좌를 개설해달라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사전 수요조사 방식을 도입할 경우, 시간이 지날수록 철학 인문학 등 비인기 강좌는 대학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달 중순이면 많은 대학이 수강신청에 돌입한다.
또 한 번 인기 강좌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불꽃을 튀길 것이다.
“인기, 비인기 강좌가 명확히 갈리기 때문에 수강신청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죠. 대학도 시장경쟁 원리를 따라가는 걸까요? 학기마다 벌어지는 수강신청 전쟁을 볼 때마다 대학의 현실이 서글프기만 합니다.”(성균관대 4학년 김상혁 씨)
※ 이 기사의 취재에는 동아일보 대학생 인턴기자 이은택(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