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미(맨 오른쪽)와 류승룡(가운데)이 주연을 맡은 영화 ‘불신지옥’은 종교 폄하 문제로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젊은 세대까지도 신들림 현상을 두고 ‘신령(귀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과학, 철학 교육이 한참 덜 된 것 같다. 종교적 광신주의와 함께 모든 극단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지닌 이 영화를 종교 폄하, 개신교 폄하라고 비난하는 것도 몰상식하다. 대부분 영화를 보지 않은 채 영화 밖으로의 ‘논점 변경의 오류’를 범하며 한국의 개신교와 그 신도들이 얼마나 좋으니 문제니 하면서 싸우는데, 그 모습이 영 밉상이다.
수많은 사람의 귀신 체험담, 그리고 접신이니 퇴마니 하는 귀신 존재론 및 심령 능력은 물질세계 밖에서 ‘귀신이 보인다(온다)’고 주장하거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고 훈계까지 하는 신비주의자들의 아성 같은 것이다. 따라서 뇌파·초음파·전자음성·특수촬영 탐지 등 다양한 수법을 통한 각종 귀신 증거의 채집, 증명도 불가능하지만 그 반증 또한 무효하고 무익하다. 신과 영은 믿는 사람의 마음이나 착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니까.
영화 ‘불신지옥’은 한국 공포영화계에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다. 공포영화에도 ‘논리적 감수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긴장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감성 및 심리작용은 설득력 있는 스토리 속에서 더욱 왕성히 증가한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음(감성)과 두뇌(이성) 사이를 오가면서 ‘아! 저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논리적인 설득과 현실성에 탄복한다. 그 순간 온몸에는 소름이 돋는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논리적인 긴장과 공포 속에서 지적인 쾌감과 만족을 얻는 게 가능한 영화다.
‘살인의 추억’ 연출부 출신의 40세 늦깎이 이용주 감독은 단단한 이야기, 탁월한 심리 조율, 개성 있는 연출로 ‘내러티브의 공포’ ‘무드로서의 공포’ 창출에 성공했다. 공포물은 다분히 공상적이며 오락적인 장르의 픽션에 불과하긴 하나, 허구 속에서도 나름의 논리구조를 지녀야 설득력과 긴장감을 조성하며 공포감을 배가할 수 있다.
또 우리의 마음, 혹은 잠재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는 두려움과 무서움을 자극하거나 불러내야 한다. 귀신이 됐든, 괴물이 됐든 그것의 존재 이유와 공격-엄습-한풀이 과정이 논리적 맥락에서 인식돼야 한다. 좋은 공포물일수록 우연이나 돌발, 과장된 음향에 대한 의존이 적다.
공포의 주범이 무엇이 됐든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하며, 전율스러운 형상이나 과도한 효과음보다 미묘한 심리전(드라마와 서스펜스)에 더 비중을 둬야 한다. 이런 식이라야 좋은 공포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는 것이다. ‘불신지옥’의 모든 공포와 비극은 우리 일상에서 시작된다. 집에서 사라진 여동생, 옥상에서 목을 매고 떨어진 이웃 여자, 기도에 집착하는 엄마 그리고 아파트를 떠도는 기괴한 소문들….
가장 일상적인 공간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내뿜는 귀기(鬼氣)는 관객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공포의 대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일 수 있고, 안전하다고 믿는 집이 공포의 공간이 되며, 여동생에게 내가 몰랐던 비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나(당신)의 평범한 일상을 섬뜩하고 끔찍한 공포의 순간으로 바꿔놓는다.
공포물은 여타 장르와 달리 관객의 ‘특별한’ 반응, 바꿔 말해 관객에로의 ‘특별한’ 전달을 기반으로 한 영화다. 즉 스릴이나 서스펜스와는 다른 ‘몽환적인 공포’의 효과를 관객으로 하여금 경험케 해야 한다. 산문적인 논리와 분석, 시적인 감성과 환상의 조화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공포감을 자아낼 수 있는 파워와 호흡이 더 중요하다. 영화 ‘불신지옥’에서 다소 아쉬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