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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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는 애들이 국제중·특목고 간다?

‘입학사정관제’ 시대, 초등학생 스피치학원 열풍

  •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입력2009-08-13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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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잘하는 애들이 국제중·특목고 간다?

    3월5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서울대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학생들이 전교학생회장 및 부회장 임원선거를 하루 앞두고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본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전 의사가 되고 싶은 임○○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하면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7월28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A스피치학원. 한 여학생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교실 가득 울려 퍼졌다. 초등학교 4학년인 임양은 1분 동안 ‘나의 꿈’을 주제로 대본 한 줄 없이 유창하게 말을 이어갔다.

    스피치를 듣는 학생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7명의 또래 친구들은 발표자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한마디를 경청했다. 서울 강남, 목동과 경기 분당 등 교육열이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스피치학원을 찾는 초등학생이 늘고 있다.

    A학원 관계자는 “원래 성인을 위한 스피치학원으로 운영해왔는데 방학에 초등학생이 대거 등록해 따로 반을 편성하게 됐다”며 “자녀들의 스피치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부모들이 먼저 학원을 찾아와 수업을 개설해달라고 요구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올 여름방학을 전후로 이 학원에는 초등학생 50여 명이 등록했다. 이 학원의 방학특강 학원비는 1회 3만원이며 수업은 총 10회로 진행된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서울 서초구, 강남구에 사는 학생. 강북에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수행평가 좌우하는 발표력 키우기 ‘선행학습’

    경기도 분당의 B스피치학원도 방학을 맞아 초등학생반을 개설했다. 1회 2시간으로 구성된 수업 시간에 발음 교정, 발성 연습, 말하기 매너 및 자신감 있게 말하기, 토론하기 등을 가르친다는 설명이다. 역할극이나 동화구연을 하기도 한다. B학원 원장은 “특히 의견 발표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당당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중점적인 교육목표로 삼는다”고 말했다.

    초등학생들이 스피치학원에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다. A스피치학원에 초등학교 6학년, 3학년 형제를 등록시킨 한 학부모는 “학교 성적은 좋은데 숫기가 없어 수업 시간에 당당하게 발표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며 “현대사회는 ‘자기 PR’ 시대인 만큼 아는 것보다 아는 것을 말로 잘 표현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특목고, 명문대 진학 등의 목적으로 일찍이 ‘선행학습’을 시키는 사례는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인 자녀를 경기도 일산 C스피치학원에 보내는 한 학부모는 “요즘은 학교 성적에서 수행평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 수행평가의 근간이 발표라 스피치를 따로 가르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특목고, 명문대 진학을 목표로 한다면 중고등학교 내신이 중요한데 이에 도움이 되는 스피치 교육을 비교적 시간이 많은 초등학생 때 미리 해놓으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해 스피치학원을 찾은 초등학생 가운데는 국제중학교 면접을 대비해 이와 관련된 스피치 훈련을 받으려는 사례가 많았다. A학원 원장은 “국제중 입시를 내건 학원 홍보가 금지됐는데도 국제중 대비 사교육은 공공연히 이뤄졌다”며 “학부모들의 ‘수요’에 맞춰 ‘공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말 잘하는 애들이 국제중·특목고 간다?

    7월28일 서울 서초구의 한 스피치학원에서 초등학생들이 스피치의 기본기 훈련을 받고 있다.

    국제중 입학을 둘러싼 사교육이 과열되자 2010년부터는 서울권 국제중(대원·영훈국제중)의 입학 전형 가운데 면접 부분이 삭제됐다. 그럼에도 ‘학생회장반’ 같은 특별반에서 스피치 수업을 듣는 학생이 많아지는 것은 왜일까.

    5학년생 자녀를 둔 한 학부모는 “국제중 서류전형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력, 경험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학생회장 경력이라고 강남엄마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다”며 “회장선거에서 당선 가능성을 높이려면 동료 학생들에게 어필하는 말하기 훈련이 필수적이어서 학원에 등록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 학부모가 눈여겨본 과정은 A학원 내 ‘학생회장반’. ‘학생회장반’에서는 학생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연설문을 짜주고 리허설도 한다. A학원 원장은 “이 과정을 수강한 학생 중 90% 이상이 학교 임원으로 당선됐다”고 자랑했다. ‘학생회장반’의 교육비는 1회 8만~10만원으로 정규 과정보다 비싸다.

    국제중 입시반을 운영하는 서울 양천구 D입시학원 원장은 “국제중이 학생 임원 출신에게 주는 공식적인 가산점은 없지만, 국제중 합격자 90%가 학생 임원 출신인 점이 학부모들을 자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찌감치 특목고를 겨냥해 말하기 교육을 시키는 학부모들도 있다. 2010년 입시 요강을 기준으로, 대부분의 특목고가 구술면접을 선발 과정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전체 점수 중 15% 안팎은 이 면접 성적이 좌우한다.

    면접이 당락 좌우 … 맞춤식 수업도 성행

    4학년인 딸을 분당의 B스피치학원에 보내는 학부모는 “요즘은 초등학생 때부터 특목고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조금 시간 여유가 있을 때 말하기 연습을 해둬서 손해볼 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6월, 특목고 구술면접에 교과지식을 묻는 문제를 배제하고 인성 등 기본적인 자질을 측정하는 문항에 집중할 것을 지시했다.

    입시만을 타깃으로 한 사교육 시장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정책이다. 하지만 한 학부모는 “인성 역시 얼마나 말로 잘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라며 “이를 겨냥한 사교육 시장을 막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대입 신입생, 면접만으로 선발’ 발언으로 이슈로 떠오른 입학사정관제도 좋게 말하면 ‘장기적인 비전’, 나쁘게 말하면 ‘성급한 선행학습’을 염두에 둔 학부모들을 초조하게 하고 있다.

    포스텍이 올해부터 모든 신입생을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선발하겠다고 발표하는 등 주요 대학의 입학사정관제 확대 실시 방안이 속속 밝혀지면서 이를 겨냥한 ‘맞춤식 수업’을 요구하는 학부모들도 생겨나고 있다. C스피치학원에 6학년인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는 “결국 아이들 교육의 최종 목표는 명문대 진학”이라며 “입학사정관에게 자신을 잘 ‘포장’해 보여주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초등학생들의 스피치 교육 과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지연숙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밝히는 말하기 훈련을 하는 것은 좋지만 입시를 목적으로 말의 ‘테크닉’만 배우면 자기 의견만 강요하고 남의 의견은 잘 듣지 못하는 일종의 ‘소통 장애’를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또 “기본에 충실한 말하기 교육을 공교육을 통해 확대 실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 이 기사의 취재에는 동아일보 대학생 인턴기자 김유림(고려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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