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버전스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화 통화, TV 시청, 음악 감상 등을 하나의 기계를 통해 해결될 수 있게 됐다.
정체성이 모호한 ‘컨버전스 제품’은 이미 도처에 깔려 있다. 카메라나 MP3 기능은 휴대전화의 기본 사양으로 여겨질 정도이고, 최근 선보인 ‘DMB폰’(TV+휴대전화) 또한 자연스러운 존재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DVD와 VCR를 한데 합친 ‘DVD콤보’, 팩스·프린터·복사기가 합쳐진 복합기, 디지털 카메라와 MP3 기능이 탑재된 복합형 캠코더, MP3와 AV·디지털 카메라 기능까지 갖춘 PMP(개인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 발아현미기가 융합된 김치냉장고, TV가 달린 냉장고, 미니오븐·에그보일러·커피메이커가 한데 갖춰진 주방용품 등등 상상 가능한 기술의 조합은 모두 현실화되고 있는 듯하다. 올해 고객 확보를 위한 격전을 치를 것으로 예상되는 네비게이터 시장 또한 컨버전스 열풍에서 예외가 아니다. 각 업체마다 여러 기능을 융합시킨 제품을 개발하고 거기에 사활을 걸고 있다. MP3와 동영상 재생이 가능한 제품은 물론이고, DMB 기능이 융합돼 있어 거치대에서 떼어내면 들고 다니며 TV를 볼 수 있는 제품까지 선보였다.
컨버전스 제품에 대한 소비자 반응도 뜨겁다. 2005년 4월 LG전자가 출시한 ‘타임머신 TV(박지성 선수를 광고모델로 삼아 일명 ‘박지성 TV’라고 불린다)’는 전체 LCD TV 판매량의 절반을, DMB 수신단말기를 장착한 노트북은 전체 노트북 판매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다. 생방송 녹화 기능을 갖춘 타임머신 TV(TV와 VCR의 녹화 기능이 합쳐진 것)의 경우 소비자의 90%가 이 기능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LG전자 관계자는 “드라마를 보다 잠깐 화장실에 가거나 부엌에 물을 마시러 갈 때 다시 TV로 돌아와 자동녹화된 방송분을 보는 식으로 이 기능이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고 전했다.
카메라폰·DVD콤보·타임머신 TV 컨버전스 대표적 사례
산업환경 또한 컨버전스의 길을 걷고 있다. 현재 가장 큰 이슈는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일궈내는 DMB와 IPTV(Internet Protocol Television·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해 제공되는 양 방향 텔레비전 서비스)다. 휴대전화로 TV를 보고, TV로 인터넷을 하는 산업환경이 도래하면서 이에 대응하려는 기업들의 움직임도 발 빠르다. 올 초 SK텔레콤은 신규사업 부문 산하에 ‘컨버전스 추진본부’를 신설했고,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컨버전스 미디어 전략’을 발표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2006 독일 FIFA 월드컵 동영상의 인터넷·모바일 독점 중계권 계약을 체결하는 등 동영상 콘텐츠 확보를 강화하는 한편, IPTV 시대에 대비해 TV로 즐기는 포털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산업환경에서부터 개별 제품에 이르기까지 컨버전스 현상이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LG경제연구원 조준일 연구위원은 “기업들의 블루오션 전략의 결과”라고 말한다. 거의 모든 산업들이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각 기업마다 차별화된 제품을 개발, 새로운 소비시장을 창출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에 많은 기업이 검증된 기존 기술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소비 욕구를 창출하는 ‘재조합의 혁신’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시중에 출시된 컨버전스 제품들.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사실 인간의 ‘컨버전스 행동’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이뤄져왔던 것”이라며 “다만 지금은 그것이 기술적 뒷받침을 받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음악을 들으며 인터넷을 하고, TV를 보며 전화통화를 하는 ‘동시다발’ 행동은 예부터 있어왔던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기술적 발전에 힘입어 하나의 기계를 통해 하게 된 것뿐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황 교수는 “기술적으로 가능한 조합이라고 해서 여러 기능을 단순하게 합쳐놓기만 한다고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다”고 못 박는다. 디지털융합연구원의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는 한양대 이웅희 교수(경영학)는 “현재는 기업들이 기술적으로 가능한 조합으로 다양한 컨버전스 제품을 출시해놓고 소비자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카메라폰’과 같이 소비자 욕구를 정확히 읽은 컨버전스 제품은 살아남겠지만 그렇지 않은 제품은 도태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사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컨버전스 실패 사례가 있어왔다. 어떤 것은 인프라가 확충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시돼 ‘쓸모없는 고기능 제품’으로 치부됐고, 어떤 것은 즐겨 사용되지 않는 기능을 첨부해 외면을 당했다. 지난해 제주도에서 열린 ‘아이모비콘 2005 코리아’에서 이주식 SK텔레콤 상무는 “SK텔레콤은 시대 흐름에 앞장서기 위해 다양한 컨버전스 서비스를 도입했지만 실질적으로 돈을 벌지는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네이트 드라이브’ ‘모네타’ ‘보험 네트워크’ ‘1mm’ 등이 그가 예로 든 컨버전스 서비스다. 이 상무는 “네이트 드라이브의 경우 낯선 길을 찾는 것은 1년에 두세 번에 그치기 때문에 수익 창출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컨버전스 제품 실패한 경우도 많아 … 소비자 욕구 맞는 조합이 성공비결
황 교수는 “기능이 많은 제품이 무조건 성공한다고 여기는 것은 인간 행동을 오해하는 기술의 오만”이라며 “인간 행동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맞는 컨버전스 제품을 내놓아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충고한다. 그는 과거 성공을 거둔 컨버전스 제품들을 통해 ‘성공 요인’을 몇 가지 추렸는데,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행동영역과 욕구가 결합돼야 하고 △기존에 하던 행동들이 좀더 편리한 다른 방식으로 전환되는 것이어야 하며 △신기하고 재미있는, 과거에는 하지 않았던 행동 방식을 창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산업영역에서도 ‘잡종이 대세이자 뉴 패러다임’인 것은 사실이지만, 잡종이라고 해서 모두 강하다는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셈이다. 소비자의 욕구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잡종만이 컨버전스 제품, 혹은 컨버전스 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기술의 상상력과 실현 가능성이 쏟아낸 첨단 컨버전스 후보들이 소비자의 까다로운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가히 ‘잡종들의 전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