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 쌈지길 ‘쌈지아트마트’에서 젊은이들이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대개 10만원대에서 100만원대 작품.
바람에서도 어쩔 수 없이 봄기운이 느껴지는 3월1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명물이 된 쌈지길 지하 1층에 ‘쌈지아트마트’라는 그림 가게가 개업했다. 전에 점찍어둔 가방을 사기 위해 쌈지길을 찾았다는 직장인 이정아(35) 씨는 이곳에 들렀다가 젊은 작가 이완의 작품에 30만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많이 흔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 씨가 사려고 했던 가죽 가방은 32만원.
이 씨가 이완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까닭은 미술작품 가격이 가방 값보다 싸다는 것 외에도 이것이 여러 점 제작되는 판화가 아니라 캔버스에 그린, 단 하나뿐인 작품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 씨는 “화가가 직접 그린 그림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라며 “어쩐지 그림 보는 안목까지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미술작품을 구입하는 건 부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마트에서 옷이나 가방처럼 편하게 쇼핑할 수 있어서 좋네요. 가격도 생각보다 싸고요.”
최근 미술품 투자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면서 아마추어 미술품 애호가들이 쇼핑하듯 쉽게 미술작품을 구경하고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인기를 얻고 있다.
가격 내린 할인점 컨셉트로 출발
쌈지아트마트는 ‘중간유통망’의 이윤을 줄여 작품 값을 내린 할인점 컨셉트로 출발했다. 즉 미술작품이 판매됐을 때 화랑이 가져가는 몫을 크게 줄이고 ‘박리다매’를 통해 수익을 내겠다는 것이 쌈지아트마트의 전략. 또한 작은 공간에 다양한 작가의 그림을 전시해 넓은 전시장에서 그림을 전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였다.
작가 입장에서는 작품 판매창구를 가질 수 있는 데다 전시공간도 확보한 셈이어서 크게 반기고 있다.
“컬렉터 층이 확실히 두터워지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젊은층에서 미술품을 구입하는 분이 많아 자신감을 얻었어요. 작가들도 저희 취지에 공감해 작품 가격을 많이 낮춰줬습니다. 하지만 판매작가 선정기준은 낮은 작품 가격이 아니라 ‘상업적으로 가능성이 있는가’입니다. 작품을 구입한 분들이 그 작가가 성장하는 것을 봐야 다시 작품을 살 재미를 느끼겠지요.”(양옥금, ‘쌈지아트마트’ 큐레이터)
쌈지아트마트에서는 15만원이면 김수자·이불 같은 세계적 작가들의 판화 작품을 구입할 수 있고, 한젬마의 지퍼로 만든 주머니 겸 작품은 4만5000원에 팔린다. 미술계 스타인 낸시 랭의 팝아트 판화는 15만원으로 젊은 여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액자가 포함돼 있어 바로 집에 걸거나 선물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 양옥금 씨는 “보고 즐기기에는 유명 작가들의 판화가 좋고, 투자라면 젊은 작가들의 오리지널 원화나 조각 작품을 권한다. 젊은 작가가 뜨면 초기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귀띔했다.
2004년 말에 시작된 ‘인사동 열린경매’도 미술품을 ‘충동구매’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기회다. ‘열린경매’는 우리나라의 최대 경매회사인 서울옥션이 운영하고 10만원대에서 500만원 이하의 미술품을 거래한다. 2005년 11월 6차 경매에서 69%의 낙찰률을 기록하는 등 날로 인기가 높아지는 중이며, 7차 경매가 3월18일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릴 예정. 다른 옥션과는 달리 참가비가 없으므로 미술품에 대한 안목과 경매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3월18일 인사동 열린경매에 나올 백남준의 ‘러브’. 예상 낙찰가는 100만원. 표화랑의 ‘옥션아츠’ 경매에 나온 윤영혜의 작품으로 추정가는 60만원. 인사동 열린경매 장면(왼쪽부터).
서울 인사동의 오래된 가게들과 젊은 미술·공예 작가들의 가게 등 모두 60여개의 가게,식당, 카페 등으로 이뤄진 쌈지길 내부 광장. 지하에 ‘쌈지아트마트’가 있다(위). 서울 사간동에 새로 문을 연 ‘선 컨템포러리’(아래).
서울옥션의 구화미 씨는 “젊은 인기작가들이 대개 화랑과 전속계약 관계여서 작품 가격이 비싼 반면, 유명 작가의 소품이나 전업 작가들 작품은 상대적으로 싸게 거래된다”고 말했다.
인사동의 전통 있는 상업화랑인 선화랑이 서울 사간동에 새로 문을 연 ‘선 컨템포러리’도 젊은 작가들의 원화를 감상하고 쇼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선 컨템포러리’의 권희은 큐레이터는 “선화랑이 가진 노하우로 투자가치가 높은 젊은 작가들을 선정해 전시한다. 100만원 안팎의 작품이라도 투자개념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울 강남권의 대표적 상업화랑인 표화랑(대표 표미선)이 운영하는 ‘옥션아츠’(www.auctionarts.co.kr)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한 인터넷 미술품 쇼핑몰. 젊고 가능성 있는 작가들의 미술작품만 판매하는 전문 갤러리로 아트상품 몰과는 다르다. 표 대표는 “미술 대중화를 위해 2000년 이후 주력해온 사업”이라며 “대학 졸업전 등을 통해 가능성 있는 작가를 발굴해왔다”고 소개했다.
큐레이터 등 전문가 조언 충분히 들어야
90년대 버블 붕괴로 막대한 손해를 본 이후 한동안 침체됐던 세계 미술품 시장은 중국 등 아시아 작가들의 부상과 함께 다시금 활황 국면을 맞고 있다. 2004년 10월부터 2005년 9월까지 현대미술 작품의 가격상승률이 28.8%를 기록해(AMR리서치) 같은 기간 다우지수 상승률 3.75%의 7배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 제2의 옥션 회사가 생겨나고, PB뱅크가 미술품 투자 컨설팅을 도입했다거나 아트펀드가 소개되는 것도 이러한 세계 미술시장의 호황을 반영한 현상이다.
그러나 2억원 이상 현금을 최소 4년 넘게 투자할 수 없다면 아트펀드에 투자하기가 어렵고, 아마추어 컬렉터가 미술품에 투자해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묻지마’ 주식투자이상으로 위험한 게 사실이다. 따라서 젊은 작가들의 중저가 작품을 구입한다면 미술작품에 대해 배우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 물론 이 경우에도 큐레이터 등 전문가들의 조언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이 좋다.
최근 중저가 미술품 거래의 트렌드는 판화보다 원화나 오브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대표적인 상업화랑인 갤러리현대도 판화를 판매하던 아트숍을 올 초 소품 원화의 판매 갤러리로 전환했다. 몇 년 전 화랑들의 집중 마케팅으로 판화 열풍이 불었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판화 작품을 150만원이 넘는 고가에 판매하면서도 200장 넘게 에디션을 남발한 결과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미술작품을 ‘소유’하고 바라보는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작가가 물감 위에 남긴 자신감과 머뭇거린 흔적, 천재적인 아이디어를 ‘물건’으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 ‘상품’으로 전락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것이 대부분 작가들의 정서지만, 오히려 대량생산 시대에 미술품의 아우라는 더욱 강렬해지고 있다. 올봄 트렌디한 가방보다 젊은 작가의 실험적인 작품을 ‘쇼핑’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