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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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파워’ 왜 거듭되나

필리핀 바뀐 정권도 민중 욕구 수용 못해 … 권력에 반발, 초헌법적 수단에 쉽게 의존

  • 김동엽/ 청주대 전임강사·동아시아정치경제학 iamkimdy@hanmail.net

    입력2006-03-08 16: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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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25일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뜻 깊은 날이다. 21년간 장기 집권한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피플파워’로 상징되는 시민혁명으로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회복한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매년 피플파워 기념행사에는 그날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여 죽음의 터널을 벗어난 감동과 환희를 상기하곤 했다.

    하지만 20주년이 되는 올해는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산사태와 반정부 시위, 그리고 군부 쿠데타 설에 이은 국가비상사태 선포 등으로 민주화를 기념하는 의미가 퇴색했다. 비록 2월24일 선포된 국가비상사태가 예방적인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 언론 통제 강화와 일부 반정부 인사들의 체포 등은 필리핀 국민들에게 마르코스 시절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비록 지난 3일 국가비상사태가 해제됐지만 필리핀 정국은 여전히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해 7월 현직 장관 7명을 포함해 11명의 고위관료가 일시에 사임했고, 두 차례의 피플파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아키노 전 대통령이 아로요 현 대통령에게 선거 부정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으며 사임을 요구했다. 필리핀 여론조사 기관에 따르면 국민의 75%가 아로요의 사임을 바라는 것으로 조사됐다.

    필리핀 민중, ‘피플파워’에 피로감

    하지만 아로요 대통령은 보수적이면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가톨릭계의 입장 유보와 군부의 불개입 선언, 라모스 전 대통령의 정치적 해결 방안 제시 등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하원에 상정된 탄핵안의 진행을 지켜보자는 의견에 따라 시위는 잦아들었다. 지난해 9월 탄핵안이 하원에서 부결된 뒤에도 시위의 물결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로요 대통령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그의 권위 상실은 국가 운영에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최근의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나름대로 현재의 위기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으로 읽힌다.



    필리핀은 이미 두 차례나 피플파워를 통해 현직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역사가 있다. 1986년에는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했고, 2001년에는 부패와 무능으로 상징되던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시민들의 압력으로 사임시켰다.

    하지만 필리핀 피플파워는 ‘미완의 혁명’으로 묘사된다. 혁명의 결실이 민중에게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6년 피플파워는 전통적 엘리트들의 ‘전면 복귀’를 낳는 계기가 되었을 뿐, 민중들의 목소리는 민주주의 정권에서 담아내지 못했다. 빈부의 격차는 더 커졌고, 지속적인 경기침체 탓에 빈곤층은 더욱 확대됐다.

    2001년 피플파워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몰아냈지만, 새롭게 들어선 정권 또한 부정과 부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피플파워로 이루고자 했던 국민들의 열망이 번번이 외면당함으로써 일부에서는 ‘국민들이 피플파워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다.

    피플파워는 시민혁명의 일종으로 기존의 정치제도가 사회적 욕구와의 갈등을 적절하게 소화해내지 못할 때 초헌법적 방법을 동원하여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은 제도의 불안정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조장하여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정치나 경제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필리핀에서 이와 같은 피플파워가 거듭해서 일어나는 이유로는 전통적인 엘리트들에 의한 권력의 독점과 권력의 사유화가 꼽힌다. 권력의 독점은 같은 엘리트 계층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회적 소외세력을 낳는다. 특히 극심한 빈부 격차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빈곤층은 지속적으로 사회적 불안요소가 되고 있다. 권력의 사유화는 이를 이용한 사적인 이익 추구를 낳고, 이는 부정과 부패의 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곧 국민들의 제도에 대한 충성심 약화로 이어진다. 국민들은 시민혁명과 같은 초헌법적 수단에 쉽게 의존하게 되고, 일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권력 변동에 이용하기도 한다.

    현재 필리핀에서 일고 있는 반정부 운동의 주도세력도 과거 두 차례의 피플파워의 주도세력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1986년과 2001년 당시의 시민혁명에서는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색깔을 달리하는 시위 주도세력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연합함으로써 피플파워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가톨릭계를 포함한 보수적 엘리트 계층과 이의 추종자들,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좌파 운동세력이 거리의 시위를 주도했고, 이에 군부의 개혁세력이 동참하는 형태였다.

    반정부 주도세력 전과는 미묘한 차이

    하지만 현재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는 아키노 전 대통령과 일부 엘리트 계층은 이전과는 달리 가톨릭계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마땅한 대안이 부재한 상태에서 권력의 공백이 발생할 경우, 극좌파 공산세력의 정치적 부상이나 극우파 군부세력의 준동을 우려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필리핀 민중들의 좌절감을 대변하고 있다는 좌파계열 단체들은 조직적 역량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전통적 엘리트 계층과 군부의 견제로 인해 시민혁명을 독자적으로 이끌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두 차례의 피플파워에서 성공의 열쇠를 쥐었던 군부도 현재는 이렇다 할 분열의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 소수 군 병력이 이탈의 조짐을 보이고 이에 시위 주도세력이 동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아로요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 이들의 연합을 초기에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시위를 부추길 수 있는 언론의 보도 내용을 통제하고, 시위 주도 혐의가 있는 인사들을 체포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정국의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대통령과 정치권, 특히 의회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아로요의 지지기반이었던 하원은 좌파 성향 의원들의 체포에 반발해 여야 할 것 없이 한목소리로 그를 비난하고 있다. 앞으로 아로요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더욱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강경한 조치에 대해 권위주의 체제로의 복귀를 알리는 전주곡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이와 같은 시나리오가 전개될 경우 과거의 피플파워에서 나타났던 이념을 초월한 또 다른 반정권 연합이 등장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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