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표준영정.
우리 한민족은 어떨까.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로서 단일한 혈통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은 진실인가 허구인가. 허구 쪽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아마도 옳을 것이다. 한민족의 피에는 본토인, 북방계, 남방계가 섞여 있다는 연구 결과가 단적인 예다. 이 같은 결과는 유전학적 연구와 고고학적 유물을 통한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외에 문헌에 기록된 외래인(外來人) 유입 사례도 많이 있다. 여기서는 고고학적 유물과 문헌 자료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에 유입된 외래인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 건국 후 영토 확장 과정서 다른 핏줄 받아들여
먼저 우리 민족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오늘날 한민족이라 불리는 우리도 옛날 선사시대에는 지구상을 떠돌던 형제들 몇몇에 불과했다. 이들이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정주하면서 경작을 하고, 자신의 고유 영역을 정하면서 집단을 형성해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집단 고유의 특징이 나타나고, 관습이 세대를 건너 전해지면서 문화가 형성됐다. 역사학에서는 초기 민족이 형성되는 시기를 신석기시대로 본다.
한민족이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방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기록돼 있다.
고조선 유물을 검토해볼 때 건국 과정에 다른 지역 혈통이 많이 참여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짐승 무늬가 많은 북방식 청동기, 황하 유역의 혈통이 많이 썼던 세 발 달린 그릇 등이 그 예들이다. 이렇게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참여해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을 내세운 고조선이 건국했다. 그 후 고조선은 주변의 다른 부족을 흡수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성장했다.
고조선이 와해되는 과정에서는 여기에 속했던 사람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이들은 얼마 후 한민족이라는 공동체로 다시 나타나지만,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혈통들과 섞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자시대로 내려오면서 외래인에 관한 내용은 문헌으로 전해진다. 왕조순으로, 먼저 고구려부터 살펴보자.
광개토대왕비에는 고구려가 주변국을 병합하고 다른 핏줄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백제 역시 주변의 많은 소국을 병합하면서 강국으로 기반을 다졌다. 그런데 신라와 가야에서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다른 면이 나타난다. 고구려나 백제는 주변국을 병합하는 과정을 밟은 데 비해 신라는 외래인을 받아들인 사례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 외래인이 도래한 것과 관련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가야의 허황후 이야기다. 가야의 첫 왕인 김수로왕의 부인이 멀리 인도에서 왔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 권4 탑상(塔像)편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에 등장한다. 허황후는 멀리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왔는데, 이를 수로왕이 맞이해 왕비로 삼고 가야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신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신라 4대 왕인 석탈해에 관해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탈해는 본시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생인데,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쪽 천리 되는 곳에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당시 신라와 가야는 남방세력과 많은 해상 교류를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많다’는 의미는 양적인 표현을 넘어 정치권력화할 수 있을 정도의 교류라는 점이 중요하다.
신라에는 북방세력도 있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접할 수 있다. ‘삼국유사’ 1권 진한(辰韓)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진한(辰韓)의 늙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진(秦)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망명해왔다. 그래서 또 다른 이름으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고토에 진한(辰韓) 사람들이 있었는데, 여기에 중국의 진(秦)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해 이곳으로 와서 정착했다. 그 수가 많았기에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렀다.”
‘삼국사기’ 1권 박혁거세조에도 사로(斯盧)의 6촌사람들이 신라의 주인공이며, 이외에 중국 진(秦)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해 신라로 들어왔다는 설명이 나온다. 삼국통일을 이루면서 신라는 많은 개혁을 하는데, 그중 특기할 만한 것이 군제(軍制) 개혁이다. ‘9서당’이라는 직제를 만든 이 개혁에는 순수 신라인이 아닌 백제인, 고구려인, 말갈인도 포함됐다. 통일된 신라 사회에 새로운 피가 수혈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말갈인까지 참여시킨 것을 보면 당시 통일신라의 변화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단일민족’ 논리는 민족의 우수성 강조하기 위한 수단?
왕건에 의한 고려 건국은 종교가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고려는 해상활동을 통한 경제력으로 통일을 이룬 나라다. 예성강 일대의 해상세력이 왕건의 통일 기반이었다. 이 해상세력은 해외무역에도 깊게 관여했던 만큼 많은 외래인과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외부 사정을 파악함은 물론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도 알게 됐을 것이다. 고려는 건국 후 체제정비 과정에서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를 중용해 개혁을 주도하게 했다.
고려는 북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북방 지역의 발해 유민 등 다른 민족이 고려인으로 귀화했다.
서기 1300년경부터 동북아의 국제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고, 이를 이용해 이성계는 원(元)의 지배를 받던 고려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북방세력인 여진족 사람 퉁두란을 끌어들였다. 조선 건국에 참여한 퉁두란은 그 후 이지란(李之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청해(靑海) 이씨의 시조가 됐다. 조선 건국에 참여한 여진족 사람은 이지란 외에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성군(聖君)으로 받드는 세종의 즉위식 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 회회교도들이 세종이 즉위하는 국가 대사에 참석한 것이다. 이들은 이슬람교의 성직자들로, 조선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이었다. 조선 땅에 이슬람교의 성직자들이 있었다면 조선인 중에도 이슬람교도가 있었을 것이고, 또 많은 이슬람인들이 거주했다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한민족이 단일한 혈통이 아니라는 역사적 사료는 이밖에도 많이 있다. 그렇다면 한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는 어디서 나오게 된 것일까. 필자는 우리 민족이 역경을 극복해오는 과정에서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일민족을 내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논리가 유용한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용의 자손’임을 내세우며 중화민족을 강조할 때 큰 거부감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은 우리의 ‘단일민족’ 주장에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한국을 떠올릴 가능성이 크다. 그럴 경우 우리가 세계로 뻗어나가고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피(被)정복민의 장점을 골라 취한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요약한 로마의 성공 요인이다. 이를 유전학적으로 달리 말하면 ‘잡종강세’의 승리 사례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로마제국이 망해가는 과정은 그 반대의 사례를 제공한다. 쇠퇴기의 로마는 주변의 적을 제어할 힘도 없으면서 로마의 순수 혈통주의를 고집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에 안주하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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