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5월15일 오전 청와대에서 헌법재판소의 탄핵기각 결정과 관련,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고 있다.
“이념으로 가는 시대 이미 끝났다”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한 측근의 분석은 ‘국가관과 애국심, 그리고 시대정신’이다.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는 일련의 과정도 노대통령이 주의 깊게 봤을 거라는 진단이다. 12척의 배로 배수진을 친 용기와 전략, 혜안과 판단력 등은 시공을 뛰어넘어 21세기 한국호의 선장인 노대통령이 당장 취해도 부족함이 없는 유익한 좌표로 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4월11일 출입기자단과 한 산행에서 노대통령은 ‘드골의 리더십과 지도자론’을 소개하며 드골과의 만남을 소개했다. 이때쯤 취재진들은 노대통령의 과거 여행의 목적과 배경을 조금씩 풀어냈다.
로베스피에르, 빌헬름 1세, 나폴레옹 등 유럽 역사 속 인물들을 통시적으로 만나 이해하고자 노력한 점도 이순신, 드골과의 만남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링컨’과의 대화도 마찬가지. ‘기술강국 2만불 시대’ ‘동아시아 경제변화와 국가의 역할 전환’ 등을 통해 한국의 오늘과 미래를 예측하는 데 필요한 각종 지표와 자료, 안목도 새롭게 다졌다. 타임머신을 탄 노대통령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종횡으로 오가며 영웅을 만나 그들의 의식세계와 리더십에 천착했다. 5월14일, 63일간의 과거여행을 끝낸 노대통령은 새로운 모습으로 21세기 한국호의 진로를 설정할 것이란 전망들이 나온다. 선각자들과의 회동에서 노대통령은 과연 어떤 가르침을 받고 어떤 모습으로 대중 앞에 다시 설까.
노대통령이 탄핵의 굴레를 벗어나기 이틀 전인 5월12일, 노대통령의 정치동지 이광재 17대 국회의원 당선자(열린우리당)는 한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노대통령과 핫라인을 형성하는 이당선자인 만큼 정치권의 관심은 각별했다.
2003년 5월15일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이 끝난 뒤 노무현 대통령(왼쪽)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정권을 잡기 전 마오쩌둥 아래서 공산주의자였던 덩샤오핑은 1978년 정권을 잡은 뒤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시도한다. 탈이데올로기-실용주의를 표방하면서 경제성장과 부의 증진을 최고의 목표이자 선으로 삼았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과 ‘최고의 복지는 일자리 창출’이라는 이당선자의 주장은 어딘가 닮아 보인다. 이당선자가 ‘공산주의는 최고선’이란 도그마에 빠져 있던 혁명동지들을 숙청한 덩샤오핑식 ‘피날레’까지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다.
열린우리당 이광재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민생경제 안정에 주력 … 개혁도 양보 못해”
노무현 대통령은 상생과 통합의 정치 원칙에 가치를 부여한다. 다만 개혁을 ‘앞장서’ 추진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뒤로 빠지겠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정치는 당에 맡기는 대신 청와대는 정책 중심의 대(對)국회 관계 설정 및 정책보좌 역량 강화에 주안점을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건은 이미 무르익었다. 우리당은 총선을 통해 ‘친노(親盧) 정당’으로 탈바꿈했다. 같은 친노이면서도 색깔과 이념, 지향점에 미묘한 차이를 보이던 정동영 전 당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는 동반 입각을 결정했다. 김혁규 당선자도 마찬가지. 이들의 동반입각은 차기 대선 예비주자의 원심력을 차단, 노대통령의 친정체제 강화라는 효과를 가져왔다.
당에 남아 있는 천정배 신기남 정세균 이강래 의원 등 친노 우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실용주의적 안정노선’을 선호한다. 대중주의 현실주의 성향이 강한 이들은 개혁을 하되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노대통령은 당권파인 이들의 실용주의 노선에 힘을 실어주었다. 5월16일 단행된 대통령비서실 개편도 당과 청와대의 역할분담 원칙에 입각, 추진했다.
노대통령의 뒷덜미를 낚아챈 또 하나의 주제는 경제였다. 이순신을 만나되 그의 리더십을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 고민의 일단을 드러냈다. 탄핵기간 동안 노대통령은 경제보좌관, 경제학자들과 수시로 토론을 했다. 케인스, 하이에크의 이론, 이스트, 슘페터 모델에 대한 학술적 논의도 병행했다. 기술혁신·일자리 창출·유가동향·중국경제 등 구체적 현안까지 토론에서 다뤄졌다. 노대통령은 이 과정에 경제문제는 막연한 불확실성이 아니라 불안전한 구조들의 근본적인 개선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토론에서 민생경제 안정에 주력할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5월15일 노대통령은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생각 없이 현실과 타협하지는 않겠다”고 강조했다. 민생경제 분야에 국가적 에너지를 결집하겠지만 경제를 빌미로 정부의 개혁의지를 꺾으려는 ‘불순한 의도’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당초 원고에 없던 내용으로 시대의 화두인 개혁과 혁신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을 거듭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노대통령과 재계는 당분간 ‘불안한 동거’ 시대로 접어들 수밖에 없어 보인다.
외교 안보 전문가들을 수시로 만난 노대통령은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국호’의 안전한 항해를 위한 해법 찾기에 골몰했다. 당장 결단을 요구받는 이라크 파병문제의 처리가 외교술의 변화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로 등장했다. 청와대 측은 “약속을 한 만큼 지킨다”는 태도다. 그러나 다른 길을 찾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근 이라크 포로들에 대한 학대 및 고문 사실이 밝혀진 뒤 일부 파병국은 이를 파병철회의 수단으로 활용할 여지를 찾느라 부심하고 있다. 노대통령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리당 내 17대 당선자의 파병반대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파병과 한ㆍ미 동맹 등 현안에 대해 노대통령은 “가치 지향은 있되 실용주의로 가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밝혔다. 외교 안보 분야의 경우 노대통령의 실용주의 노선이 가장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순신과 나폴레옹을 만나고 온 노대통령은 10~20년 후를 내다보는 자주국방의 미래상, 그리고 우리 국방력의 현주소를 조목조목 따져 챙겼다고 한다. 실용과 개혁이라는 양날개로 무장한 노대통령의 무한질주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