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인근은 ‘라식공화국’의 메카로 불린다. 서초와 강남구 2개 구에 전국 개원 안과의 15%에 달하는 100여곳의 라식수술 전문클리닉이 몰려 있고, 이중 50여곳이 강남역 6번 출구 반경 100m 안에 있으니 ‘라식공화국’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니다.

최근 이 라식공화국에 구조조정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2000년부터 불기 시작한 라식 바람을 타고 최근까지 연인원 15만명 정도가 라식수술을 받았지만 올 들어 그 바람이 잦아들면서 라식 수요가 급속하게 줄고 있는 것. 2002년을 정점으로 지난해부터 조금씩 줄기 시작한 라식 수요는 올 들어 지난해의 10% 수준으로 감소했다. 이 때문에 수억원에서 10억원까지 주고 라식 기계 1대를 구입했던 안과들은 리스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사채를 빌려 쓰거나 라식 기계를 팔아버리고 수술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 심지어 문을 닫고 다른 지역으로 가거나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는 클리닉도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다.

라식공화국의 실질적인 ‘황제’로 군림하며 라식수술의 대표주자임을 자처하던 서울 강남구 삼성동 A안과. 2000년부터 각기 다른 층에 라식센터와 백내장센터를 운영했던 이 안과는 지난 4월 라식센터를 없애고 백내장센터 한켠에 라식 기계를 옮겨놓고 가끔씩 찾아오는 환자를 맞고 있다. 공식적으로 폐업신고를 낸 곳도 5곳, 부동산에 나와 있는 안과만 무려 15곳에 달하고 있다. 병원 컨설팅 전문회사 닥터피알의 이병철 대표는 “라식수술 수요가 절정기에 달했던 2002년에 잇따라 들어선 안과 클리닉들이 라식 기계를 비싼 값에 구입한 데다 인테리어에 너무 많은 비용을 투입했다”며 “따라서 매각 비용이 너무 비싸 거의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매각을 기다리고 있는 라식 기계만 50여대에 이를 정도다.

인테리어와 라식 기계 구입비용으로 10억원 넘게 투자한 안과 클리닉의 경우 몇몇 유명 클리닉만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하루에 보통 8~9건, 많은 경우 20건씩 하던 라식수술을 일주일에 한 건 정도 하다 보니 간호사 인건비도 건지지 못하는 안과가 속출하고 있는 것. 한때 후배 의사를 두 명이나 데리고 있다 최근 모두 내보낸 B안과 K원장은 “직원 월급은커녕 기계 리스 비용도 내지 못해 은행에 대출신청을 해봤지만 개업 때 빌린 비용 때문에 추가 대출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매각 기다리는 라식 기계만 50여대



일부 안과에서는 10억원을 호가하는 라식 기계를 2대나 들인 곳도 있다. 1995년 국내에 처음 들어온 라식 기계는 1세대부터 5세대까지 발전하며 수술의 정확성과 안전성을 확보해왔다. 이에 따라 라식 기계를 초창기에 수입한 안과는 경쟁이 심해지면서 최신식 라식 기계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에 기계를 바꾼 안과는 그야말로 ‘폭탄’을 맞은 셈이다. 예전에 구입한 기계의 리스 비용을 다 갚지 못한 상황에서 추가로 빚을 지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2월 강남지역 안과를 헐값에 처분하고 강북으로 옮긴 이모 원장(42)은 “이제 라식수술을 포기하고 안과의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안질환 치료에만 전념할 것”이라며 “사실 안질환 치료를 거부해온 강남 안과들의 행동은 의료법을 위반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강남역 인근 안과들의 라식환자 대 일반환자 비율은 2000년 이후 8대 2에서 9대 1 정도로 계속 줄어들다 지난해부터 일부 안과에서는 아예 일반환자를 거부해왔다. 간판만 ‘안과’로 내걸었지 실상은 ‘라식병원’이었던 셈. 일반환자를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병원이 시력교정술 위주로 진료가 이뤄져왔고, 병원 입구에 ‘수술 전문병원’이란 문구를 적어놓은 곳이 많아 일반환자들은 병원 입구에서 발걸음을 돌리기 일쑤였다. 이렇다 보니 실제 일반 안질환으로 이들 전문병원을 찾는 환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안과들이 최근 일반 안질환 환자를 받기 시작했으며, 많은 안과들이 전문분야를 백내장으로 급속하게 전환하고 있다. 백내장의 경우 노인 인구의 급증으로 환자가 늘고 있는 데다 갑자기 수요가 줄어들 염려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술 비용도 100만원에 가까워 수입이 라식보다 적지 않고, 수술이 비교적 간단하고 안전해 수술 후 부작용에 대한 논란의 여지도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라식수술 일색으로 꾸며졌던 강남 라식공화국 안과들의 홈페이지는 백내장을 라식과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으며, 일부 안과는 아예 백내장만을 전문 치료분야로 내놓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연 4만명에 육박했던 라식수술의 수요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의료컨설팅업계에서는 이를 단기적인 수요의 한계로 분석한다. 즉 계속되는 불경기 속에서 라식수술을 받을 만한 사람은 다 받았다는 것. 지금껏 라식수술의 주요 대상은 20대부터 3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라식수술 인구가 누적인원 15만명이 넘어가면서 단기적으로 수요가 벽에 부딪혔다는 이야기다. 라식수술은 각막을 깎아내는 수술인 탓에 성장이 진행 중인 중ㆍ고등학생은 수술이 불가능하고, 계속되는 불경기는 새로운 라식수술 수요를 실제 수술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 더욱이 2000년 이후 4년 동안 이어진 강남 라식공화국의 출혈경쟁은 수요의 소진을 부추겼다. 2002년까지 200만원에서 300만원에 달하던 라식수술비는 120만원까지 떨어졌고, 평일 야간과 일요일까지 수술을 하는 클리닉도 많았다.

라식 대신 안과질환으로 주력 변경

하지만 이와는 다른 분석을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병ㆍ의원 광고대행사 메디칼애드 송영진 대표는 “라식 수요가 한계에 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절대적 숫자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카드 발급 기준 강화와 카드 돌려막기 금지 여파가 더 큰 요인이다”고 밝혔다. “기존 라식수술 고객 중 적지 않은 수가 이후 신용불량자가 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미루어 신용카드 이용 규제가 라식 전문병원의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는 게 송대표의 주장이다. 실제 라식수술이 절정에 이르렀던 2002년 상반기에는 라식 전문클리닉이 일부 금고들과 계약을 맺고 환자들에게 수술비를 대출해주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라식수술의 부작용에 대한 원성은 남아 있는 수요조차도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최철영 ALC안과 원장은 “라식의 일반적인 부작용을 언론이 과대 포장해서 알림으로써 해가 갈수록 라식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며 “이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라식 대신 노터치 수술이나 라섹 같은 다른 시각교정 수술로 돌아서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따르면 2002년 10월부터 올 4월까지 라식수술과 관련해 접수된 상담 사례는 한 달 평균 9.94건(189건)으로, 2000년 1월에서 2002년 9월까지의 5.4건(174건)에 비해 배 가까이 늘어났다는 것. 눈부심, 야간 시력 감소, 부정난시, 원추각막, 안구건조증 등의 부작용 및 시력이 교정되지 않거나 오히려 저하했음을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라식수술 후유증을 호소하며 집단행동에 들어간 안티라식(cafe.daum.net/ antilasik)카페는 강남 라식공화국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카페는 라식수술 경험자와 피해자 등이 모여 만든 커뮤니티로 현재 회원 수만 2만5000여명에 이른다. 이들이 벌이는 수술의 폐해 및 부작용에 대한 홍보활동은 인터넷이라는 무한공간을 넘나들며 강남 라식공화국의 광고ㆍ홍보 물량공세를 잠재워버렸다.

‘붕어빵 미인’을 만든다는 강남 성형타운의 몰락에 이어 2004년 여름, 강남의 라식공화국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