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
유명한 일본 속담에도 여실히 드러나듯, 일본 문화에서 사무라이는 역사의 핵심에 놓인 거대한 기호이며 두 개의 검이 호위하는 일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일본 감독들 사이에서 일본의 상징적 실체인 사무라이를 풍자하고 현대화하는 작업이 유행이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고하토’에 나오는 사무라이는 동성애의 열기에 몸이 달고, 야마다 요지 감독의 ‘황혼의 사무라이’ 속 주인공은 아내의 장례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검까지 판다. 그것도 부족해 이제는 사무라이 문화를 전복하는 신(新)사무라이 영화 대열에 코미디까지 가세했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하나’에서 주인공 소자는 복수보다는 옆집의 어여쁜 과부에게 눈길을 돌리고, 검을 휘두르기보다 붓을 들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하나’를 보다 보면 죽은 구로사와 아키라(‘7인의 사무라이’ 등 걸작 사무라이 영화를 만든 일본 감독) 감독이 관에서 벌떡 일어날까 걱정된다.
쪽방촌의 주인공, 할복은 직업병 비유 ‘웃기는(?) 설정’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났던 사무라이 소자는 원수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에도의 한 가난한 마을에 정착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복수의 집념을 불태우기보다 순박하고 정감 넘치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더 즐거움을 느낀다.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주인공은 한 아이의 엄마인 과부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에 큰 점이 있다는 원수를 찾아낸 소자. 그러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소자는 점점 번민에 사로잡힌다.
일단 놀랍게도 우리의 주인공 소자는 첫 장면부터 누추한 빈민촌 쪽방에서 등장한다. 사무라이의 체면을 구기는 이 같은 행태는 그가 동네 시정잡배와의 싸움에서조차 지고, 아버지 원수가 누구인지 몰라 허둥대는 모습으로까지 이어진다. 사무라이 자존심에 단단히 먹칠을 한 셈.
봄이면 옆집의 또 다른 사무라이는 할복을 자행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봄마다 도지는 ‘직업병’이라며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자의 아버지도 사무라이의 숨막히는 대결이 아니라 고작 바둑을 두다 시비 끝에 지나가는 청년에게 죽임을 당한 터다. 그러니 ‘꽃보다’라는 의미의 원제목을 ‘사무라이보다’라고 바꿔도 아무 문제가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장치 속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내러티브는 ‘하나’가 1700년대 에도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1700년대 에도는 일본의 문학작품 ‘주신구라(忠臣藏)’의 배경이기도 하다. 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복수를 위해 47명(혹은 46명)의 사무라이들이 원수의 목을 베고 모두 할복자살한다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주신구라’는 수많은 일본 문학과 연극의 모티프가 돼왔다.
그런데 고레다 히로카즈는 소자의 복수에 대한 번민이라는 기둥 줄거리에 굳이 ‘주신구라’ 이야기를 집어넣어 사건을 풍자한다. 예를 들면 ‘사무라이들은 어영부영 복수를 한 것이다’ ‘사실은 누구도 죽고 싶지 않았다’ 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식이다.
영화는 가면 갈수록 정통 사무라이극에서 ‘삐딱선’을 탄다. 소자가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복수를 소재로 하는 연극을 만들어 장터에서 돈을 번다. 연극은 복수에 대한 재현이지만 철저한 허구다. 소자는 바로 이 연극을 통해 ‘복수냐 삶이냐, 명예냐 실리냐’라는 결단 내리기 어려운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려 든다.
소자가 준비하는 연극은 어찌 보면 허구와 현실이 혼재된 핏빛 카니발의 상황과 흡사하다. 가면과 바람개비에 둘러싸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온 소자. 그러나 영화에서 허구란 ‘꽃은 피나 열매는 맺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제 답이 나온다. ‘꽃보다’라는 원제의 이 영화는 의(義)와 충(忠)을 빙자한 복수에 대한 집착, 즉 일본의 심리적 원형성에 열매를 달아주는 작업인 것이다. 복수와 사무라이라는 기호학적 아우라에 휘둘리기보다 인간과 현실을 바라보려는 고레다 히로카즈의 따뜻한 마음이 스크린에 은은히 우러나온다.
기존 사무라이극에 없는 훈훈한 사람의 입김 ‘물씬’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세필로 그려내는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은 부채 장수의 목소리나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내는 에도시대 사람들을 통해 당대의 일상을 복원해낸다. 이는 기존 사무라이극에 없는 훈훈한 인간의 입김을 더한다.
사실 전 세계 영화계에 그만큼 인간적이고 낙천적이며 마음 따뜻한 감독도 드물 것이다. 그는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 일본 복지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눈망울과 함께했고, ‘원더풀 라이프’에선 가장 행복한 기억을 품고 죽음의 저편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죽음을 이토록 따뜻한 온도로 녹여내는 감독의 시선을 보며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에서도 감독은 줄곧 똥이나 흙탕물, 쓰레기 같은 이미지 속에 자신의 인물들을 배치해놓는다. 그러고는 천연덕스럽게 똥을 많이 누면 그 똥은 지주가 사갈 떡이 된다는 대사를 내보낸다. 똥이 떡이 된다니 놀라운 변환 아닌가. 누더기 같은 생을 보내는 일본의 헐벗은 이들이 가진 따뜻한 정과 에너지의 놀라운 승화가 ‘똥이 떡이 된다’는 철학이다. 사실 애벌레가 나비가 된다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하나’는 이렇듯 진흙탕 속에서 핀 연꽃 같은 우화다. 복수와 용서에 관한 우화. 여기서 글, 즉 문(文)은 사무라이의 검, 무(武)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결국 소자는 검 대신 붓을 택하며 허구 대신 현실을, 복수 대신 인간을 선택한다.
47명의 사무라이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넋을 기렸다는 고이즈미 전 총리야 뒤로 자빠질 일이겠지만, 우리로서는 멋진 오카다 준이치의 모습과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야자와 리에의 연기 변신을 즐기면 될 일. ‘하나’는 진정 유쾌하고 행복한 복수극이다. 또 다른 ‘잔바라 무비’(사무라이 영화의 다른 이름)의 유쾌한 진보라 아니 할 수 없겠다.
유명한 일본 속담에도 여실히 드러나듯, 일본 문화에서 사무라이는 역사의 핵심에 놓인 거대한 기호이며 두 개의 검이 호위하는 일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일본 감독들 사이에서 일본의 상징적 실체인 사무라이를 풍자하고 현대화하는 작업이 유행이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고하토’에 나오는 사무라이는 동성애의 열기에 몸이 달고, 야마다 요지 감독의 ‘황혼의 사무라이’ 속 주인공은 아내의 장례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검까지 판다. 그것도 부족해 이제는 사무라이 문화를 전복하는 신(新)사무라이 영화 대열에 코미디까지 가세했다.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하나’에서 주인공 소자는 복수보다는 옆집의 어여쁜 과부에게 눈길을 돌리고, 검을 휘두르기보다 붓을 들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하나’를 보다 보면 죽은 구로사와 아키라(‘7인의 사무라이’ 등 걸작 사무라이 영화를 만든 일본 감독) 감독이 관에서 벌떡 일어날까 걱정된다.
쪽방촌의 주인공, 할복은 직업병 비유 ‘웃기는(?) 설정’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났던 사무라이 소자는 원수가 살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에도의 한 가난한 마을에 정착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복수의 집념을 불태우기보다 순박하고 정감 넘치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더 즐거움을 느낀다.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주인공은 한 아이의 엄마인 과부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러던 어느 날, 얼굴에 큰 점이 있다는 원수를 찾아낸 소자. 그러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소자는 점점 번민에 사로잡힌다.
일단 놀랍게도 우리의 주인공 소자는 첫 장면부터 누추한 빈민촌 쪽방에서 등장한다. 사무라이의 체면을 구기는 이 같은 행태는 그가 동네 시정잡배와의 싸움에서조차 지고, 아버지 원수가 누구인지 몰라 허둥대는 모습으로까지 이어진다. 사무라이 자존심에 단단히 먹칠을 한 셈.
봄이면 옆집의 또 다른 사무라이는 할복을 자행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봄마다 도지는 ‘직업병’이라며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게다가 소자의 아버지도 사무라이의 숨막히는 대결이 아니라 고작 바둑을 두다 시비 끝에 지나가는 청년에게 죽임을 당한 터다. 그러니 ‘꽃보다’라는 의미의 원제목을 ‘사무라이보다’라고 바꿔도 아무 문제가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장치 속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내러티브는 ‘하나’가 1700년대 에도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1700년대 에도는 일본의 문학작품 ‘주신구라(忠臣藏)’의 배경이기도 하다. 억울하게 죽은 주군의 복수를 위해 47명(혹은 46명)의 사무라이들이 원수의 목을 베고 모두 할복자살한다는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주신구라’는 수많은 일본 문학과 연극의 모티프가 돼왔다.
그런데 고레다 히로카즈는 소자의 복수에 대한 번민이라는 기둥 줄거리에 굳이 ‘주신구라’ 이야기를 집어넣어 사건을 풍자한다. 예를 들면 ‘사무라이들은 어영부영 복수를 한 것이다’ ‘사실은 누구도 죽고 싶지 않았다’ 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식이다.
영화는 가면 갈수록 정통 사무라이극에서 ‘삐딱선’을 탄다. 소자가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복수를 소재로 하는 연극을 만들어 장터에서 돈을 번다. 연극은 복수에 대한 재현이지만 철저한 허구다. 소자는 바로 이 연극을 통해 ‘복수냐 삶이냐, 명예냐 실리냐’라는 결단 내리기 어려운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려 든다.
소자가 준비하는 연극은 어찌 보면 허구와 현실이 혼재된 핏빛 카니발의 상황과 흡사하다. 가면과 바람개비에 둘러싸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온 소자. 그러나 영화에서 허구란 ‘꽃은 피나 열매는 맺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니 이제 답이 나온다. ‘꽃보다’라는 원제의 이 영화는 의(義)와 충(忠)을 빙자한 복수에 대한 집착, 즉 일본의 심리적 원형성에 열매를 달아주는 작업인 것이다. 복수와 사무라이라는 기호학적 아우라에 휘둘리기보다 인간과 현실을 바라보려는 고레다 히로카즈의 따뜻한 마음이 스크린에 은은히 우러나온다.
기존 사무라이극에 없는 훈훈한 사람의 입김 ‘물씬’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세필로 그려내는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은 부채 장수의 목소리나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퍼내는 에도시대 사람들을 통해 당대의 일상을 복원해낸다. 이는 기존 사무라이극에 없는 훈훈한 인간의 입김을 더한다.
사실 전 세계 영화계에 그만큼 인간적이고 낙천적이며 마음 따뜻한 감독도 드물 것이다. 그는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서 일본 복지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눈망울과 함께했고, ‘원더풀 라이프’에선 가장 행복한 기억을 품고 죽음의 저편으로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죽음을 이토록 따뜻한 온도로 녹여내는 감독의 시선을 보며 죽음마저도 두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하나’는 이렇듯 진흙탕 속에서 핀 연꽃 같은 우화다. 복수와 용서에 관한 우화. 여기서 글, 즉 문(文)은 사무라이의 검, 무(武)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결국 소자는 검 대신 붓을 택하며 허구 대신 현실을, 복수 대신 인간을 선택한다.
47명의 사무라이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들의 넋을 기렸다는 고이즈미 전 총리야 뒤로 자빠질 일이겠지만, 우리로서는 멋진 오카다 준이치의 모습과 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야자와 리에의 연기 변신을 즐기면 될 일. ‘하나’는 진정 유쾌하고 행복한 복수극이다. 또 다른 ‘잔바라 무비’(사무라이 영화의 다른 이름)의 유쾌한 진보라 아니 할 수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