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일(현지 시간) 뉴욕 모터쇼 프레스 데이에 현대자동차 미국 법인 존 크래프칙 사장이 제네시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당시 한국에서 데스밸리까지 자동차 한 대 운송료는 편도 기준 2000달러. 여기에 테스트 드라이버와 실험 엔지니어들의 한 달 체류비까지 감안하면 총경비는 1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그럼에도 유럽의 고급차 메이커는 비용은 전혀 상관 안 한다는 듯 많은 차량을 가지고 와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
사막지역인 데스밸리는 온도가 높아 사람이 살기 힘들지만, 세계 유수 자동차 회사들이 혹서 테스트를 하기 위해 몰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혹서지역에서는 연료 증발에 따른 문제는 없는지, 냉각계는 잘 가동되는지, 차체 변색은 없는지 등을 시험한다.
프리미엄 신모델 … 4월5일 뉴욕 모터쇼에서 공개
자동차란 한마디로 시험의 산물이다. 수많은 시험을 통해 각 부품의 최적화를 이뤄야 품질을 확보할 수 있는 것. 이때 시험 대상 차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은 불문가지다. K 연구원은 “혹서 테스트는 럭셔리 자동차 개발 과정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면서 “이것만으로도 럭셔리 자동차 개발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이하 현대차)가 럭셔리 자동차에 도전장을 냄으로써 세계 자동차 업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현대차는 럭셔리 세단 BH(프로젝트 이름)의 컨셉트카 제네시스를 4월5일 뉴욕 모터쇼에서 세계 언론에 공개했다. 현대차 관계자들은 “제네시스는 2005년 단종된 다이너스티(2.5ℓ, 3.0ℓ)와는 배기량, 차급, 개발 컨셉트 등이 완전히 다른, 한마디로 프리미엄 이미지를 추구하는 신모델”이라고 강조한다.
제네시스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세계 언론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미국의 권위 있는 자동차 전문지 ‘모터 트렌드’는 3월 말 발간된 5월호 표지모델로 제네시스를 내세우고 5쪽에 걸쳐 자세히 소개했다. ‘모터 트렌드’는 이 기사에서 “제네시스는 현대차를 럭셔리 메이커 반열에 올릴 정말 놀라운 차”라고 호평했다.
현대차가 럭셔리 자동차에 도전장을 내민 것은 정몽구 회장의 ‘품질경영’이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2000년대 초반 미국 자동차 컨설팅 기관 J.D.파워의 신차 품질조사(IQS)에서 하위권을 맴돌았지만, 2006년에는 3위로 수직 상승했다. 외국 자동차 메이커의 한국지사에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업계 관계자의 평가다.
제네시스 외관 .
“4~5년 전 미국 브랜드 차를 타고 다녔는데 주행거리 1000km도 안 됐을 때 갑자기 운전대가 돌아가지 않아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반면 요즘 타고 다니는 그랜저는 3년이 다 돼가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다. 90년대 초반에 타고 다니던 뉴쏘나타가 잔고장이 많았던 점에 비춰보면 놀라운 발전이다.”
‘밸류 브랜드(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차)’로 분류되는 현대차가 럭셔리 자동차를 내놓는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자동차산업연구소 박홍재 소장은 “에쿠스는 대형차이긴 하지만 세계시장에 내놓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서 “에쿠스 개발 과정을 통해 쌓은 기술로 럭셔리 자동차 분야에서도 선진 메이커와 경쟁할 수 있는 차를 그것도 싸게 만들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제네시스의 미래가 온통 장밋빛만은 아니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푸조 같은 대중차 메이커가 수익성이 좋은 줄 뻔히 알면서도 럭셔리 자동차를 내놓지 않는 이유를 현대차는 되새겨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비싼 부품을 잔뜩 넣어 차체만 크게 만든다고 해서 다 럭셔리 자동차가 되는 것은 아닌데, 현대차가 너무 쉽게 도전한다는 얘기다. 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럭셔리 자동차는 국가 이미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캐딜락은 미국적 풍요로움을, 독일 벤츠나 BMW는 독일 엔지니어들의 장인정신을 상징한다. 도요타는 일본의 국가 이미지가 뚜렷하지 않다고 판단해 글로벌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한국은 럭셔리 자동차에 어울리는 이미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자동차 전문가들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것은 제네시스가 현대차 브랜드를 그대로 이용한다는 점. 도요타가 럭셔리 시장 공략을 위해 렉서스라는 별도 브랜드를 만든 것과 대조적이다. 업계에서는 “별도 브랜드로도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유통망과 애프터서비스망 재구축비, 홍보비 등 별도 브랜드 런칭에 들어가는 투자 비용을 건질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분석한다.
럭셔리 자동차가 ‘기본으로’ 갖춰야 할 품질도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현대차는 J.D.파워의 IQS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지만, 내구품질조사(VDS)에서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IQS에서 좋은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게 2004년 무렵인 만큼, 당시 출시된 차량이 내구성 조사를 받는 올해에는 좋은 평가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불안한 노사관계 역시 럭셔리 자동차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가톨릭대 경영대학원장 김기찬 교수는 “생산성도 좋고 상대적으로 노사관계도 안정된 아산공장을 제쳐두고 울산공장 같은 생산성 낮은 공장에서 제네시스를 양산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회사 관계자들은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노조의 요구에 밀렸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현대차 관계자들은 이런 우려나 지적에 대해 “내년 초에 나올 차를 보면 알게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과연 그럴까. 현대차의 기술과 브랜드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시험은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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