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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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에 나 홀로 유학 ‘독종’소리 들으며 공부했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부모가 들려주는 그의 성장 스토리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7-04-18 17: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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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에 나 홀로 유학 ‘독종’소리 들으며 공부했다

    4월2일 한미 FTA 협상 타결 기자회견을 마친 후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오른쪽)과 카란 바티아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가 악수하고 있다(사진 위).<br>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만난 김현종 본부장의 부모 김병연(오른쪽)·최정심 부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이후 김현종(48) 통상교섭본부장의 독특하고도 화려한 이력이 새삼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명문대인 컬럼비아대 출신으로 미국 변호사, 대학교수, 세계무역기구(WTO) 법률자문관 등을 거쳐 2004년 불과 45세의 나이에 장관급에 해당하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에 오른 김 본부장은 14세 때부터 홀로 미국에 유학한 ‘조기유학 1세대’다.

    역시 어려서부터 외국에서 공부한 그의 남동생 현용(45) 씨와 여동생 미형(43) 씨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각각 비즈니스스쿨 MBA와 로스쿨을 졸업하고 홍콩의 투자금융회사 대표 및 금호아시아나그룹 법무담당 부사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니 3남매 유학의 결실은 이보다 더 성공적일 수 없다. 이들 3남매의 부친은 우루과이와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김병연(77) 전 코리아헤럴드·내외경제신문 회장.

    “요새 아들 기사에 제 이름이 자꾸 거론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너무 부담돼서 통상교섭본부에 제 이름은 좀 빼달라고 누차 얘기했는데….”

    김 전 회장은 조기유학에 관심 있는 요즘 부모들을 위해 3남매를 성공적으로 유학시킨 그간의 경험을 들려달라는 기자의 요청을 거듭 거절했다. 오랜 실랑이(?) 끝에 마침내 차 한 잔 함께 나누는 것을 수락한 김 전 회장 부부는 “특별하게 해준 것은 없고, 다만 좀더 높은 비전을 보여주려고 애썼다”며 멋쩍게 웃었다.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본부장은 외교관인 부친을 따라 두 살 때부터 미국`→`한국`→`일본`→`한국`→`미국으로 옮겨 다니며 자랐다. 덕분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겪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부모는 3남매를 ‘잔소리’보다는 ‘비전 제시’를 통해 꿈을 키우도록 격려했다.



    책상 밑 마룻바닥에 운동화 못 박아 고정한 채 공부 열중

    그중 한 예가 김 본부장이 열 살 무렵 온 가족이 함께 나섰던 ‘유수대학 탐방여행’이다. 며칠에 걸쳐 예일, 하버드, 매사추세츠공대(MIT), 컬럼비아대 등을 둘러보며 아버지는 3남매에게 이들 대학 출신의 세계적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줬다. 그러면서 “나중에 너희가 갈 대학도 이곳들 중에서 골라라”라고 넌지시 말했다. 당시 대여섯 살에 불과했던 김미형 부사장은 하버드대 캠퍼스 잔디밭에서 책을 읽고 있던 장애인 학생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김 부사장은 그날 이후 ‘나 또한 노력하면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외국에서의 생활은 기회였지만 한편으로는 고난이기도 했다. 김 본부장은 일본에서는 ‘조센징’, 미국에서는 ‘옐로 칼라’라는 소외계층에 속한 자신을 자각하며 자랐다. 김 전 회장은 “그런 생각이 어린 현종에게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각오를 갖게 해준 것 같다”고 말했다.

    14세에 나 홀로 유학 ‘독종’소리 들으며 공부했다

    초등학생 시절의 김현종 본부장(오른쪽)과 동생 현용 씨.

    일본에서 소학교에 입학한 김 본부장은 일본 아이들에게 ‘조센징’이라고 놀림을 받자 다시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쓸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의 새 부임지인 네덜란드로 따라가는 대신 혼자 미국에 남기로 결심한 14세의 현종은 아시아인이 그를 포함해 두세 명에 불과한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의 명문학교인 윌브램 앤 맨슨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곳 ‘백인 천국’에서 그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쳤다.

    “항상 ‘너는 한국 사람이다. 아버지 때문에 외국에서 살지만,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게 오히려 부담감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국 사람으로서 일본인이나 미국인에게 뒤질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거든요.”(김병연 전 회장)

    덕분에 부모는 김 본부장에게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독종으로 여겨질 정도로 스스로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2~3학년을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김 본부장은 영어 한마디 못하는 꿀벙어리였다. 풀이 죽은 김 본부장은 방과 후 영어 선생을 쫓아다니며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떼썼다. 보통 방과 후 한 시간가량 영어를 배우게 돼 있는데, 그는 선생을 졸라 두세 시간씩 배웠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영어로 대화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실력이 향상됐다.

    중학교 때는 책상 밖으로 나오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아예 책상 밑 마룻바닥에 운동화를 못 박아 고정해놓고 그 운동화를 신고 앉아 공부했다. “미국 아이들이 두 시간 공부한다면 나는 4~5시간 공부해야 이길 수 있다”는 각오에서였다. 미국에 혼자 남겨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김 본부장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외롭다”고 했다.

    “그럼 가족이 있는 네덜란드로 오라고 했습니다. 대신 이번에 네덜란드에 오면 평생 아버지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한다고 했죠. 그 후로는 혼자 지내는 것이 외롭다거나 힘들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어머니 최정심 여사)

    자녀들의 영어 실력에만 온갖 정성을 다하는 요즘 부모들과 달리 김 전 회장 부부는 오히려 3남매에게 한국어 가르치기에 열성을 다했다. 집 안에서는 한국어만 사용하게 했고 3남매의 학년에 맞춰 국어와 국사 교과서를 구해다가 방학마다 가르쳤다. 월간 소년잡지나 만화책 등도 매달 구해와 읽게 했다. 이 영향으로 김 본부장은 미국 변호사 시절까지도 ‘공포의 외인구단’ 등 한국 만화책을 즐겨 읽었다. 대학 시절에는 한국에서 온 유학생 선배들의 영어 숙제를 해주는 대신, 신문을 교재 삼아 모르는 한글 단어와 한자를 배웠다고 한다.

    14세에 나 홀로 유학 ‘독종’소리 들으며 공부했다

    <b>김현종 Profile</b><br>- 1959년 서울 출생 <br>미국 컬럼비아대 국제정치학 석사 및 <br>동 대학 대학원 통상법학 박사 <br>- 1985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 취득, <br>미국 밀뱅크트위드 법률사무소 변호사, <br>스톡홀름 상공회의소 중재인 <br>- 1989년 김신&유 변호사사무실 변호사 <br>- 1993년 홍익대 무역학과 겸임교수 <br>- 1995년 외교통상부 통상자문변호사 <br>- 1998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통상전문관 <br>-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국 <br>분쟁해결상소기구 법률자문관, <br>WTO 법률국 수석고문변호사 <br>- 2003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br>통상교섭조정관(1급) <br>- 2004년 외교통상부 <br>통상교섭본부 본부장 <br>

    아르바이트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기도

    빠듯한 공무원 월급에 3남매를 유학공부 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김 전 회장은 아이들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김 본부장의 대학 진학을 앞두고 달랑 한 채뿐이던 집을 팔았다. 당시 외교부의 한 후배가 “노후 대비는 어떻게 하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느냐”며 그를 말렸는데 요즘에 와서는 “그때 참 잘하셨다”며 부러워한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은 “집 한 채 판 것으로도 모자라 은행 빚까지 지게 돼, 외교부 퇴직 얼마 전까지 빚을 갚았다”며 “검소하게 살면서 학비 대주는 부모를 보면서 아이들이 쉽게 엇나가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본부장은 대학 시절에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한번은 페인트 칠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지금도 다리에 상처가 남아 있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은 항상 아들에게 “얼른 공부 마치고 27, 28세에는 군대에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본부장은 1977년 컬럼비아대학에 입학, 국제정치학으로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같은 대학 로스쿨에서 통상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로펌에서 일하다 잠시 귀국해 6개월 단기 석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김 전 회장은 “현종이 국적이 미국이고 군대도 안 갔다는 세간의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유학생활 내내 유학비자를 연장해가며 미국에 머물렀고 강원 인제 원통리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했다는 것. 최전방에서 북한 방송을 많이 듣게 된 김 본부장은 제대 후 집에 와서 북한 말씨, 특히 북한 욕설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해 가족들을 웃겼다고 한다.

    제대 후 다시 미국 로펌으로 돌아간 그는 87년 당시 서울대 영문학과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부인 강금진(43) 씨와 맞선을 본 뒤 이듬해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큰아들 민상(17) 군과 작은아들 지상(9) 군을 슬하에 두고 있다.

    김 본부장은 한미 FTA를 체결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은 적이 없다. 박사 학위와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땄을 때도, 세계에서 모여든 140명의 변호사를 물리치고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WTO 법률자문관으로 최종 선발됐을 때도 아버지는 여전히 무뚝뚝했다. 오죽하면 큰며느리가 “아범이 잘한 일은 잘했다고 칭찬 좀 해달라”며 애교 섞인 부탁을 했을까.

    김 전 회장은 한미 FTA를 타결짓고 오랜만에 귀가한 아들에게 “네가 애국을 했고 큰 효도를 했다. 참 장하다”며 처음으로 칭찬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남들 몰래 아들에게 신경 쓰는 자상한 아버지”라며 그의 부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한미 FTA 협상 기간 내내 밤늦게 귀가해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는 아들이 걱정돼 매일 밤 아파트 앞마당에 나가 아들 서재에 불이 켜져 있는지 확인했다는 것이다(김 전 회장과 김 본부장은 같은 아파트단지, 같은 동, 다른 층에 산다).

    ‘하얏트 전투’ 내내 카메라에 비춰진 김 본부장의 인상은 날카로우면서도 무뚝뚝해 보였다. 평소 ‘독불장군’이라는 평가를 듣는 그다웠다. 그게 좀 신경 쓰였는지 김 전 회장은 아들에게 “좀 웃지 그러느냐”고 했다가 “국가 이익이 촌각에 걸렸는데 인상에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습니까”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역시나 알려진 대로 ‘국익 제일주의자’다운 면모다.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에다 자신감 넘치는 김 본부장이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보통 사람인 듯하다. 원래 종교가 없던 그도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지 한미 FTA 협상 기간 내내 교회를 열심히 찾았다고 한다. 해외출장을 갔다가 일요일에 귀국하는 날이면 집에 들르지 않고 공항에서 곧장 교회로 향하기도 했다. 김 본부장과 함께 몇 번 교회에 갔다는 김 전 회장은 “아들이 ‘하나님, 절 좀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듯했다”며 측은한 마음을 표현했다.

    자녀를 조기유학 보내는 부모들에게 조언 한마디를 청했다. 김 전 회장은 “이미 세상이 많이 바뀌어 내가 나서서 뭐라 말하긴 어렵다”면서도 “공부만 잘하는 사람이 아닌, 자기 정체성과 의지, 올바른 목표의식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부모가 잘 이끌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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