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음식문화에서 탕반(국밥, 장국밥)을 빼놓을 수 없다. 끓인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이 탕반이다. 일상적인 밥상만 해도 밥 옆에 국이 따르므로, 탕반 먹을 준비를 늘 하고 있는 셈이다.
탕반이 발달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 입맛에 맞기 때문이라기보다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의 ‘잡학사전’ 이규태 씨는 탕이 적은 재료로도 여러 사람을 배불릴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가령 쇠고기 한 근을 구우면 한 사람만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지만 쇠고기 반 근에 무나 배추시래기, 콩나물, 고사리 따위의 채소를 듬뿍 넣고 탕을 끓이면 쇠고기 맛이 나는 건더기와 국물로 네댓 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열 사람도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다. 탕반이 발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탕반 중 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음식이 설렁탕이다. 싼 가격에 든든한 포만감을 주는 음식으로 이만한 것도 없다.
감칠맛과 구수한 국물맛 내기 까다로운 요리
그런데 설렁탕의 유래가 재미있다. 조선시대 임금은 서울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한 해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며 봄마다 제사를 올리고, 친히 논을 갈았다. 선농단에는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가 모셔져 있다. 제단 위에는 생쌀, 생기장과 함께 죽인 소와 돼지가 통째로 올려졌다. 제사가 끝나면 무쇠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었으며, 소로는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 썰어놓은 뒤 구경꾼 가운데 60세 이상 된 노인들을 불러다가 먹였다. 이 탕을 백성들이 선농탕이라 불렀고, 세월이 지나면서 설농탕→설렁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설렁탕은 넓게 보면 곰국 또는 곰탕의 한 부류다. 1800년대 말에 나온 ‘시의전서’에는 곰국, 곰탕의 옛 이름인 고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때기, 꼬리, 양, 곤자소니, 전복, 해삼을 큰 솥에 넣은 뒤 물을 많이 붓고 뭉근한 불에 푹 고아야 맛이 진하고 뽀얗다.” 이때까지도 설렁탕이란 이름은 없었다. 1900년대 초반에 곰탕과 설렁탕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1940년에 나온 ‘조선요리’라는 책에는 곰국, 육개장, 설렁탕, 장국을 구분해서 적고 있다. 곰국(곰탕)은 “사태, 쇠꼬리, 허파, 양, 곱창을 덩어리째 삶아 반숙이 되었을 때 무, 파를 넣은 뒤 간장을 조금 넣고 다시 삶는다. 무르도록 익으면 고기나 무를 꺼내어 잘게 썰어 열즙(熱汁)에 넣고 후추와 파를 넣는다”라고 했으며, 설렁탕은 “쇠고기의 잡육, 내장 등 소의 모든 부분의 잔부를 뼈가 붙어 있는 그대로 하루쯤 곤다”라고 했다.
현재 식당에서는 곰탕과 설렁탕의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온갖 잡부위를 넣어 끓이는 설렁탕은 뼈가 많이 들어가 국물이 뿌연데, 어떤 곳에서는 곰탕만큼 맑은 국물을 내기도 한다. 여러 부위를 넣으면 잡냄새가 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쇠머리, 뼈, 양지머리, 사골만 넣고 끓인 것을 설렁탕이라 부르기도 한다.
곰탕과 설렁탕 맛의 깊이 차이는 고기 맛을 알아야 느낄 수 있다. 입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에 구수함이 섞이고 여기에 개운한 맛까지 어울리는 곰탕과 설렁탕을 끓이기 위해서는 먼저 재료가 좋아야 한다.
다음은 끓여내는 기술이 중요하다. 곰탕과 설렁탕을 제대로 한다는 식당의 주방장들은 나름대로 노하우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뼈와 고기를 끓이는 시간을 달리하고 뼈 국물에 고기 국물을 더하는 기술에 따라 맛 차이가 크게 난다. 특히 뼈와 고기 외에 쇠기름이 중요한데, 마지막에 기름덩이를 넣고 끓여 맛의 깊이를 더하는 기술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그 주방장, 설렁탕 맛의 ABC는 아는구나”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따져 맛있는 곰탕, 설렁탕 집을 찾아가 봤지만 대부분 낙제점 수준이었다. 내 입에는 의외로, 설렁탕 전문점도 아닌 ‘벽제갈비’의 설렁탕이 추천할 만하다. ‘벽제갈비’ 설렁탕 담당 조리장에게 몰래 받아온 설렁탕 조리법이다. 설렁탕, 결코 간단한 요리가 아니다.
탕반이 발달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 입맛에 맞기 때문이라기보다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의 ‘잡학사전’ 이규태 씨는 탕이 적은 재료로도 여러 사람을 배불릴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가령 쇠고기 한 근을 구우면 한 사람만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지만 쇠고기 반 근에 무나 배추시래기, 콩나물, 고사리 따위의 채소를 듬뿍 넣고 탕을 끓이면 쇠고기 맛이 나는 건더기와 국물로 네댓 사람, 경우에 따라서는 열 사람도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다. 탕반이 발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탕반 중 서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음식이 설렁탕이다. 싼 가격에 든든한 포만감을 주는 음식으로 이만한 것도 없다.
감칠맛과 구수한 국물맛 내기 까다로운 요리
그런데 설렁탕의 유래가 재미있다. 조선시대 임금은 서울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한 해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며 봄마다 제사를 올리고, 친히 논을 갈았다. 선농단에는 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가 모셔져 있다. 제단 위에는 생쌀, 생기장과 함께 죽인 소와 돼지가 통째로 올려졌다. 제사가 끝나면 무쇠솥에 쌀과 기장으로 밥을 지었으며, 소로는 국을 끓이고 돼지는 삶아 썰어놓은 뒤 구경꾼 가운데 60세 이상 된 노인들을 불러다가 먹였다. 이 탕을 백성들이 선농탕이라 불렀고, 세월이 지나면서 설농탕→설렁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설렁탕은 넓게 보면 곰국 또는 곰탕의 한 부류다. 1800년대 말에 나온 ‘시의전서’에는 곰국, 곰탕의 옛 이름인 고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다리뼈, 사태, 도가니, 홀때기, 꼬리, 양, 곤자소니, 전복, 해삼을 큰 솥에 넣은 뒤 물을 많이 붓고 뭉근한 불에 푹 고아야 맛이 진하고 뽀얗다.” 이때까지도 설렁탕이란 이름은 없었다. 1900년대 초반에 곰탕과 설렁탕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1940년에 나온 ‘조선요리’라는 책에는 곰국, 육개장, 설렁탕, 장국을 구분해서 적고 있다. 곰국(곰탕)은 “사태, 쇠꼬리, 허파, 양, 곱창을 덩어리째 삶아 반숙이 되었을 때 무, 파를 넣은 뒤 간장을 조금 넣고 다시 삶는다. 무르도록 익으면 고기나 무를 꺼내어 잘게 썰어 열즙(熱汁)에 넣고 후추와 파를 넣는다”라고 했으며, 설렁탕은 “쇠고기의 잡육, 내장 등 소의 모든 부분의 잔부를 뼈가 붙어 있는 그대로 하루쯤 곤다”라고 했다.
현재 식당에서는 곰탕과 설렁탕의 구분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온갖 잡부위를 넣어 끓이는 설렁탕은 뼈가 많이 들어가 국물이 뿌연데, 어떤 곳에서는 곰탕만큼 맑은 국물을 내기도 한다. 여러 부위를 넣으면 잡냄새가 나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 쇠머리, 뼈, 양지머리, 사골만 넣고 끓인 것을 설렁탕이라 부르기도 한다.
곰탕과 설렁탕 맛의 깊이 차이는 고기 맛을 알아야 느낄 수 있다. 입에 착 달라붙는 감칠맛에 구수함이 섞이고 여기에 개운한 맛까지 어울리는 곰탕과 설렁탕을 끓이기 위해서는 먼저 재료가 좋아야 한다.
다음은 끓여내는 기술이 중요하다. 곰탕과 설렁탕을 제대로 한다는 식당의 주방장들은 나름대로 노하우 하나씩을 가지고 있다. 뼈와 고기를 끓이는 시간을 달리하고 뼈 국물에 고기 국물을 더하는 기술에 따라 맛 차이가 크게 난다. 특히 뼈와 고기 외에 쇠기름이 중요한데, 마지막에 기름덩이를 넣고 끓여 맛의 깊이를 더하는 기술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 “그 주방장, 설렁탕 맛의 ABC는 아는구나”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식으로 따져 맛있는 곰탕, 설렁탕 집을 찾아가 봤지만 대부분 낙제점 수준이었다. 내 입에는 의외로, 설렁탕 전문점도 아닌 ‘벽제갈비’의 설렁탕이 추천할 만하다. ‘벽제갈비’ 설렁탕 담당 조리장에게 몰래 받아온 설렁탕 조리법이다. 설렁탕, 결코 간단한 요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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