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논술을 공부하면서 흔히 접하는 어휘가 있다. ‘양면성’이다. 양면성이란 ‘한 가지 사물에 속해 있지만 서로 맞서는 두 가지 성질’을 말한다. 우리는 양면성을 ‘장점과 단점’으로도 이해한다. 양면성에서 학생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은 ‘단점’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단정해버린다는 점이다. 또한 학생들은 이미 규정된 양면성은 쉽게 수용해도 스스로 양면성을 창조하지는 못한다. 학생들이 창의적 발상이 습관화되지 못했기에 생긴 결과다. 양면성을 말할 때 흔히 제시되는 우화를 보자.
목이 몹시 말라서 물을 찾던 수사슴이 샘물을 찾았다. 물을 실컷 마신 수사슴은 샘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 뿔이야말로 정말 일품이지. 기묘하게 갈라지고 억세게 생긴 이 뿔!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샘물에 비친 뿔을 내려다보며 황홀경에 빠진 사슴 옆에 느닷없이 사자가 나타났다. 질겁한 수사슴은 숲 속으로 도망쳤다. 사자의 걸음으로는 사슴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슴의 뿔이 그만 나뭇가지에 걸렸다. 마침내 사슴은 사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수사슴의 아름다운 뿔은 암컷을 유혹해 종족을 번식시키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 뿔로 인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상식적인 생각에 매몰된 학생이라면 수사슴이 살기 위해서는 뿔을 잘라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내놓을 법하다. 그러나 뿔이 잘린 수사슴은 수사슴의 본질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이는 창의적인 주장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면성이 주는 본질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 사례로 사자가 임팔라라는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상식적이라면 임팔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사자를 죽여야 한다. 그러나 양면성으로 접근하면 임팔라 집단을 유지하려면 사자가 일정 수의 임팔라를 계속 잡아먹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일부가 사자에게 잡아먹힘으로써 임팔라 개체 수가 조절돼 전체를 살리는 장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등학생 수준의 상식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극단적 사고를 버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가능한 상황을 두루 고려하는 감수성을 가지는 것이 창의성의 출발이다”(동국대 이철한 광고홍보학과 교수)라는 말에 주목할 만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극단적인 기피 대상이다. 그런 죽음을 창의적인 사고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죽음을 소유론으로 보면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존재론으로 보면 두렵지 않다. 간단히 말해 소유론은 이기적 욕망으로, 존재론은 이타적 욕망으로 규정할 수 있다. 상식적인 사고가 소유론이라면, 창의적인 사고는 존재론이다. 존재론으로 접근한 죽음관이 죽음의 공포를 초월해 우리 삶을 건강하게 보살핀다.
우리는 몸의 피로현상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몸이 스스로 건강상태를 체크해 우리에게 휴식을 권고하는 것’이 피로다. 내 몸이 의사가 되어 건강을 위해 스스로 내린 처방과 같다. 만약 우리 몸에 피로현상이 없다면 어떤 일을 무리하게 하다가 아무 경고도 없이 갑자기 죽어버릴 것이다. 즉, 피로현상은 몸을 혹사하지 말고 이젠 건강상태를 돌보라는 최후의 경고다. 만약 학생이 피로현상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묻는 논술문제에 이렇게 답했다면 고득점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학생들은 대부분 사회·문화 현상을 단편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창의적인 결과보다는 상식적인 결과를 얻는 데 그친다. 모든 사회·문화 현상을 양면성으로 접근해 분석해보자. 거기서 뜻밖의 독창적 사고를 얻을 수 있다. 대상에 대한 다양한 상황의 적용은 창의적 발상을 가능하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학생들이여, 영화 ‘괴물’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최단기간에 10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한 영화라는 한 가지 생각뿐인가? 그러면 안 된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작품성 있는 다른 작은 영화들이 ‘괴물’ 때문에 스크린에서 사라진다는 등의 양면성까지 끄집어낸다면 어떨까? ‘괴물’이 영화판의 괴물이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목이 몹시 말라서 물을 찾던 수사슴이 샘물을 찾았다. 물을 실컷 마신 수사슴은 샘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 뿔이야말로 정말 일품이지. 기묘하게 갈라지고 억세게 생긴 이 뿔!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샘물에 비친 뿔을 내려다보며 황홀경에 빠진 사슴 옆에 느닷없이 사자가 나타났다. 질겁한 수사슴은 숲 속으로 도망쳤다. 사자의 걸음으로는 사슴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슴의 뿔이 그만 나뭇가지에 걸렸다. 마침내 사슴은 사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수사슴의 아름다운 뿔은 암컷을 유혹해 종족을 번식시키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 뿔로 인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 상식적인 생각에 매몰된 학생이라면 수사슴이 살기 위해서는 뿔을 잘라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내놓을 법하다. 그러나 뿔이 잘린 수사슴은 수사슴의 본질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이는 창의적인 주장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양면성이 주는 본질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그 사례로 사자가 임팔라라는 초식동물을 잡아먹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상식적이라면 임팔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사자를 죽여야 한다. 그러나 양면성으로 접근하면 임팔라 집단을 유지하려면 사자가 일정 수의 임팔라를 계속 잡아먹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일부가 사자에게 잡아먹힘으로써 임팔라 개체 수가 조절돼 전체를 살리는 장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등학생 수준의 상식을 바탕으로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극단적 사고를 버리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가능한 상황을 두루 고려하는 감수성을 가지는 것이 창의성의 출발이다”(동국대 이철한 광고홍보학과 교수)라는 말에 주목할 만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은 극단적인 기피 대상이다. 그런 죽음을 창의적인 사고로 접근할 수는 없을까? 죽음을 소유론으로 보면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존재론으로 보면 두렵지 않다. 간단히 말해 소유론은 이기적 욕망으로, 존재론은 이타적 욕망으로 규정할 수 있다. 상식적인 사고가 소유론이라면, 창의적인 사고는 존재론이다. 존재론으로 접근한 죽음관이 죽음의 공포를 초월해 우리 삶을 건강하게 보살핀다.
우리는 몸의 피로현상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달리 보면 ‘몸이 스스로 건강상태를 체크해 우리에게 휴식을 권고하는 것’이 피로다. 내 몸이 의사가 되어 건강을 위해 스스로 내린 처방과 같다. 만약 우리 몸에 피로현상이 없다면 어떤 일을 무리하게 하다가 아무 경고도 없이 갑자기 죽어버릴 것이다. 즉, 피로현상은 몸을 혹사하지 말고 이젠 건강상태를 돌보라는 최후의 경고다. 만약 학생이 피로현상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묻는 논술문제에 이렇게 답했다면 고득점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학생들은 대부분 사회·문화 현상을 단편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창의적인 결과보다는 상식적인 결과를 얻는 데 그친다. 모든 사회·문화 현상을 양면성으로 접근해 분석해보자. 거기서 뜻밖의 독창적 사고를 얻을 수 있다. 대상에 대한 다양한 상황의 적용은 창의적 발상을 가능하게 하는 기폭제가 된다.
학생들이여, 영화 ‘괴물’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최단기간에 10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한 영화라는 한 가지 생각뿐인가? 그러면 안 된다.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작품성 있는 다른 작은 영화들이 ‘괴물’ 때문에 스크린에서 사라진다는 등의 양면성까지 끄집어낸다면 어떨까? ‘괴물’이 영화판의 괴물이 될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