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델리의 인도문과 그 일대의 드넓은 녹색 정원.
영국은 식민지 인도를 문명세계로 끌어내야 한다며 인도의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뉴델리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 원했던 것은 인도인들이 가진 문화적 힘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전통을 잃게 되면 인도인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인도의 지식인 가운데 에는 서구가 우월하다며 서구적인 것을 모방하거나 배우자면서 이런 영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에 맞서자고 한 이가 더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모한다스 카란찬드 간디(1869~1948)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그가 남긴 그림자가 얼마나 긴지 새삼 알게 됐다. 인도의 모든 화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반드시 그려져 있고, 웬만한 도시엔 그의 이름을 딴 ‘M. G.(마하 트마 간디) 로드’라 부르는 거리가 있었다. 그것도 도시 중심부에.
이번 기회에 간디를 제대로 알아야겠구나 싶어 뉴델리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마지막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간디 슴리티(Smriti)’부터 찾았다. 입장은 무료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백색의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싱싱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기업인이자 간디의 후원자였던 G. D. 비를라 씨의 저택인 이곳에서 간디는 생애 마지막 144일을 보냈다. 애석하게도 문이 잠겨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했으나 그곳에는 간디의 침대가 그대로 놓여 있고, 그의 상징과도 같은 둥근 안경과 지팡이, 물레, 샌들, 몇 권의 책 등이 보관돼 있다고 했다.
모든 인도 화폐의 초상화 … 웬만한 도시엔 M.G. 거리
1948년 1월30일, 그날도 간디는 이 집에서 잠을 잤고 저녁기도를 위해 정원을 가로질러 앞마당으로 갔다. 바로 그때 간디는 한 힌두 광신도가 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정원 한쪽에는 그날 오후 5시경 그가 걸어갔던 발자국(시멘트로 모형을 만들었다)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샌들 자국인 데다 생애 마지막 것이라 그런지 그의 모든 삶이 압축돼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면서 그의 후배이자 동지였던 자와할랄 네루가 그에게 바친 조사(弔死) 한 구절을 떠올렸다.
뉴델리의 간디 슴리티에 남아 있는 간디의 마지막 발자국 형상. 간디의 화장터이자 묘소인 뉴델리의 라지가트(오른쪽).
슴리티를 나와 거의 공원 규모의 라지가트로 갔다. 간디의 시신은 힌두 장례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재 또한 갠지스강에 뿌렸다. 간디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묘소로 조성된 라지가트는 조그만 검은 대리석 제단에 불과하지만 금요일이면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올린다고 했다.
내가 찾았던 날은 금요일이 아니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다. 슴리티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도 누구든 신발을 벗어야 했다. 그래서 참배객들은 어쩔 수 없이 맨발이 됐다. 맨발이 거짓 없는 순수와 평등을 뜻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잔디의 촉감이 맨발에 와 닿자 간지럽기도 하고 포근하기도 한 것이 머리로 전달돼 어느새 나는 잔디와 하나가 됐다. 아니, 간디의 혼이 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의 느낌으로만 말한다면 인도문화는 촉감의 그것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제단과 상석 위에는 꽃다발이 올려져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선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그의 혼이 타오르고 있기라도 하듯. 제단 정면에는 힌두어로 ‘헤이 람’이라 써놓았다. ‘오, 신이여’라는 뜻으로 간디가 숨을 거두기 직전 외쳤던 말이다. 그가 말한 신은 종교에서 흔히 말하는 신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뜻했다. 그에게 진리는 논리와 이성의 결과라고 보는 서구식 개념이 아니었다. 참되고 성실하고 현존하고 순수하고 선하고 유효하고 확실한 것 등을 아우르는 말이었다. 힌두교도들이 믿는 신이 이런 것이 듯.
그가 진리를 삶의 목표로 삼은 것은 인도인들이 이유 없이 홀대받는 남아프리카에서였다. 그는 인도 상사의 고문 변호사로 그곳에 갔으나 인도인들이 박해받는 장면을 수도 없이 목격했고, 심지어 그 자신도 여러 차례 당했다. 그는 진리에 살고 진리에 죽는 것을 ‘사티야그라하’라 불렀다. 우리말로는 진리파지(眞理把持)란 말로 번역된다. 그는 또 자기 일생을 진리에 대한 실험이라며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1925년)란 자서전 격의 책을 쓰기도 했다. 간디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사상은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힘사(살생을 하지 않는 것)의 계율을 지킴으로써 진리의 길, 신에의 길, 자아실현에 도달할 수 있다며 미물도 죽이지 않는 것은 물론 생명 있는 모든 것을 껴안으려고 했다. 따라서 간디에게는 영국의 지배에 대해서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에게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사티야그라하는 억압자의 마음을 울리게 할 수 있는 반면, 피억압자에겐 분노와 증오와 이기심을 억제하고 정의와 사랑과 자기희생의 정신을 발휘케 하라고 주문했다.
이런 그에게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마하트마’란 칭호를 붙여주었다. “참된 사랑이 인도문 어귀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이 활짝 열렸다. 모든 망설임은 사라졌다. 진리는 진리를 불러일으켰다. 진리의 힘을 눈에 보이게 한 마하트마를 찬양하라!”며 그에게 ‘위대한 영혼’이란 이름을 선사했던 것이다.
물레와 간디의 필체. ‘영원한 간디’전의 이차르카. 간디 슴리티 입구(왼쪽부터).
간디의 고향과 가까워 그가 자주 찾았던 뭄바이에는 현대미술관이 있는데, 인도는 떠오르는 정보기술(IT)산업 국가답게 최첨단 쌍방향 정보기술과 디자인 기법 등을 이용한 ‘영원한 간디’(Eternal Gandhi)전을 열고 있었다. 그곳엔 ‘간디의 물레’도 빠지지 않았다. 현대문명의 대표적인 이기(利器)라 할 수 있는 철도, 병원, 공장 등을 거의 죄악시하여 ‘만약에 인도에서 철도 시설을 모조리 철거해버린다 하더라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겠다’며, 손으로 물레를 돌려 인도에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고자 한 간디에 대해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한 터라 물레 전시물을 쉬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가 IT산업을 통해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지금의 인도를 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물레 하나가 움직이자 곧 옆의 것이 움직이고 금세 모든 물레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이차르카 만다라(e-charkha mandala)’를 보자 그런 그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산 시대 상황과 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일시적인 가난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며 인도 국민을 독려했다. 그에게 물레는 정치적, 경제적, 정신적 무기였던 것이다.
물레는 여러 개의 바퀴로 되어 있다. 이건 다양성 속의 통일을 나타낸다. 간디가 사티야그라하와 스와데시(국산품 애용운동)를 외치며 전국을 여행하면서 이용했던 열차의 바퀴도 물레를 닮았다. 물레가 인도를 하나로 묶는다는 뜻을 그런 식으로 나타낸 듯 보였다.
아힘사에 대한 설명도 눈여겨볼 만했다.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시작됐으나,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고 환경이 날로 악화돼가고 있는 이제 와서는 인류 모두의 평화와 삶의 질을 위한 운동으로 바뀌어가고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걸 보는 순간 전통은 박제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전시장 입구로 갔다. 흑백 활동사진이 간디의 일생을 보여준다. 바이샤(상인)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건너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간디는 보통사람들처럼 세속적인 꿈과 야심이 컸다. 하지만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의 고통을 체험하고는 자신이 할 일은 따로 있다면서 인도로 돌아왔다. 그건 사티야그라하의 실천이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인도는 결국 영국의 사슬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는 그 이듬해 한 힌두 광신도의 총탄에 이승의 생을 마감했다. 아힘사를 부르짖었던 그였기에 자기를 죽인 자를 용서했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할 일을 다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할 일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인도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이제 그 일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 그들은 이 전시회를 통해 그걸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나아갈 방향까지 제시하고 있다. ‘간디는 영원하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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