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6

..

비슷한 것은 가짜다!

  • < 우찬규 / 학고재 대표 >

    입력2004-10-07 14: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진짜는 닮지 않는다. 공자도 그런 말을 했다. ‘논어’에 ‘오자지탈주야’(惡紫之奪朱也)라는 대목이 있다. 주색에서 떨어져 나온 자색이 싫다는 얘긴데, 붉기는 다 비슷하지만 주색이 정색인 고로, 이를 흉내낸 자색은 본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슷하다고 해서 다 같지는 않다는 뜻이고, 진짜는 모방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렇다면 요즘 세상은 참 곤혹스럽다. 길 가는 여인들의 복색이 다 비슷해 보이고, 심지어 얼굴마저 서로 닮아가는 판국이니, 이들이 모두 가짜란 얘기가 아닌가. 비슷하기는 내남이 따로 없다. 어쩌면 나도 가짜일지 모른다. 내가 하는 말이지만 남이 벌써 한 말인지 모르고, 내가 취한 행동이지만 남이 일찌감치 만들어 놓은 양식일지도 모르니, 육성이 또렷하고 육신이 멀쩡하다 하여 지금 내가 과연 나란 말인가.

    사람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글은 어떻고 그림은 어떠할까. 새로움을 생명처럼 여겨야 할 글과 그림도 처지는 매한가지다. 닮은꼴이 너무도 많다.

    오늘 읽은 글은 어제 본 듯한 것이고, 어제 본 그림은 그제 본 듯한 것이다. 새롭지 않은 글과 그림이 어찌 진짜로 행세할 수 있을까. 그래서 눈 밝은 어떤 이가 “이제 예술은 죽었다”고 갈파했는지 모른다. 인간이든 예술이든 차는 것이 다 비슷한 것이요, 넘치는 것이 다 닮은 것이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연암 박지원은 비슷하거나 닮은 것을 끔찍이 싫어했던 조선시대 문장가다. 그가 쓴 ‘열하일기’에 나오는 장면이 있다. 뱃놀이하던 연암은 일행 중 한 사람이 “강산이 그림 같다”고 말하자 곧바로 나무란다. “여보시오, 당신은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 사람이오. 강산이 그림에서 나왔소,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소?” 참으로 아리송한 말이다. 이 말에 연암은 도대체 무슨 뜻을 실어놓았을까.



    어떤 학자는 연암의 말이 잘못된 비유를 꼬집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내 누이는 양귀비 같다”고 표현할 때, 여기에는 양귀비가 누이보다 예쁘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강산이 그림 같다”고 하면, 그림이 강산보다 아름답다는 뜻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연암은 ‘그림은 그림이고 강산은 강산일 따름’이라고 지적한 것이 된다. 헤아려 본즉 그럴싸하게 들린다. ‘강산이 아름답다’고만 할 것을 괜히 ‘그림 같다’고 한 사람은 연암 앞에서 큰코를 다친 셈이다.

    또 다른 글인 연암의 ‘녹천관집서’에는 잘못된 비유를 꼬집는 정도가 아니라, 비슷하거나 닮은 것의 본성을 고스란히 까발리는 대목이 실려 있다. 이 글은 맨 앞부터 이렇게 나온다. ‘옛것을 모방하여 글을 짓되, 거울이 형상을 비추듯 한다면 닮았다고 할 수 있을까? 실체의 좌우가 반대되니 어떻게 닮았다 할 수 있으랴. …그림자가 물체를 따라다니듯 한다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낮에는 난쟁이가 되었다가 해가 기울어질 때는 키다리가 되니, 어찌 닮았다 할 수 있으랴. 그림이 형상을 그리듯 한다면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니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목소리가 없으니, 어찌 닮았다 할 수 있으랴. …무릇 진짜에 가깝다 하고 닮았다고 할 때는 가짜라는 것, 다르다는 것의 의미가 들어 있다.’

    모방한 글은 물론 가짜요, 거울 속 형상, 사람의 그림자, 산수를 담은 그림이 하나같이 참이 아니라는 게 연암의 주장이다. 이러니 어지간한 글과 그림으로는 연암 앞에서 진짜 소리를 듣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기야 연암은 일찍이 ‘법고창신’의 기치를 내건 인물이었다. 그는 가짜를 탓하는 데만 머물지 않았다. 진짜에 이르는 방법을 조언하기도 했다. 곧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스스로 찾아내라는 것이다. 그는 문자를 처음 만든 창힐이 어디 옛것을 모방했겠느냐고 묻는다. 옛글이 있다면 굳이 다시 쓸 일도 없다는 말이다.

    연암인들 창작의 지난함을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뼈에 새기는 고통이라 했겠는가. 그런 고통을 피하고 비슷하게 그리는 데 만족하거나, 닮게 쓰는 데 머문다면 그림자 신세에서 벗어나기가 요원하다. 과문한 탓인지, 나는 현대예술에서 말하는 ‘패러디’니 ‘혼성모방’이니 하는 용어가 득세하는 배경을 알지 못한다. 새로움이 없고서야 무엇을 두고 창작이라 할 것인가.

    비슷한 글과 그림은 어쩔 수 없이 가짜다. 세상이 앞다퉈 빼닮기 일색으로 나아가도 ‘금강안 혹리수’(金剛眼 酷吏手·참다움을 꿰뚫는 눈과 가혹한 관리의 손, 즉 엄정한 안목)의 감시를 피해 살아남는 가짜는 없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