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을 건너온 꽃과 여인의 숨결](https://dimg.donga.com/egc/CDB/WEEKLY/Article/20/04/10/06/200410060500011_1.jpg)
천경자 화백(78)이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그의 그림에 담겨있는 어떤 마력, 꽃뱀의 무늬처럼 빨려들 것 같은 매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이 간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에 그가 그렸던 풍물화들, 타히티나 페루의 여인을 그린 그림에서는 이국 여인의 진한 몸냄새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5월17일 새로 문을 연 서울시립미술관에 천경자 상설전시실이 마련되었다. 국·공립 미술관에 마련된 개인 전시실로는 최대 규모다. 지난 1998년 천경자 화백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 93점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큰딸(이혜선씨)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훌훌 떠났다. 서울시가 보관하고 있던 이 그림들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정동의 구 대법원 건물로 이전 개관하면서 마침내 영원한 보금자리를 찾았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이전 개관 기념전으로 ‘한민족의 빛과 색’과 함께 ‘천경자의 혼’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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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의 상설전시실이 의미 있는 것은 이 전시실 안에 작가의 작품세계가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시작품 중에는 작가가 대학교 1학년(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때 그린 작품과 희귀한 인체드로잉, 그리고 월남 종군 기록화가단 시절에 그린 전장의 풍경 등 생소한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페루 발리 자메이카 등 이국의 여인 그림과 풍물기행, ‘폭풍의 언덕’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 문학작품의 탄생지를 그린 문학기행도 빼놓을 수 없다. “관람객이 마치 천경자 화백의 방 안으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서울시립미술관측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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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그림은 ‘생태’(1951년)다. 35마리의 독사가 한데 엉켜 우글거리는 모습에 절로 소름이 오싹 끼친다. 그림 한가운데에는 유독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뱀 한 마리가 있다. 아끼던 동생이 폐렴으로 죽고, 그 자신은 허락되지 않은 사랑에 빠졌던 힘겨운 시절에 그린 그림이다.
‘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뱀을 참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 동생의 죽음, 불안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징그러워 몸서리치며 뱀집 앞에서 스케치를 했고, 그러면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화가 자신의 회고다. 이 그림은 한때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으나 ‘도저히 견딜 수 없어’ 1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생태’는 천경자의 곡절 많은 삶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시절 만난 남편과의 짧은 결혼생활이 끝난 후, 화가는 한 신문기자와 사랑에 빠진다. 천경자의 자서전에 ‘김상호’라는 가명으로 등장한 그는 이미 가정이 있던 사람이었다. ‘생태’의 뱀 35마리는 그의 나이 35세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 그는 천경자의 작품세계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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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의 그림 속 여인들은 슬프다. 대부분 화려한 눈 화장에 무심하고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슬픈 느낌을 감출 수는 없다. “한(恨)은 천경자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천경자는 한국 근대기의 격동을 경험하면서 한의 정서를 여성의 감수성으로 풀어낸 작가죠.” 지난 95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렸던 대규모의 천경자 회고전을 기획한 최광진씨의 말이다. 예술원 회원인 연극연출가 이원경씨 역시 “고생 많이 하고 시달리고… 천경자는 한이 많은 여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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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작품 중에는 화가가 자신의 생을 뒤돌아보며 그렸다는 ‘내 기억의 슬픈 22페이지’가 있다. 뱀 네 마리를 머리에 얹은 여인의 초상을 담은 그림이다. 텅 빈 듯 공허한, 우수에 찬 눈망울. 그러나 꽃 한 송이를 가슴에 꽂은 여자는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삶의 어떤 신산함도 외면하지 않겠다는 듯. 이 여자가 천경자가 아니면 누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