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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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취과 의사들 “보따리 장수가 더 좋아”

조직에 얽매일 필요 없고 연봉도 훨씬 많아… 수술 일정 못 잡는 병원 속출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4-10-05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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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취과 의사들 “보따리 장수가 더 좋아”
    ”아빠는 왜 출근 안 해?” 마취과 전문의 김모씨(37·서울시 강동구 천호동)는 직장이 따로 없다. 지난 99년 전문의 자격을 딴 김씨는 대학병원에서 2년간의 펠로(전임의) 생활을 끝내고 지난해 10여곳의 종합병원에서 초빙 의뢰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의원을 개업할 만큼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가 선택한 삶은 ‘프리랜서’. 의료계에서 ‘보따리 장수’로 불리는 출장진료 전문의사가 된 것이다.

    그의 하루는 휴대폰 전화음과 함께 시작된다. 알음알음으로 알려둔 성형외과와 종합병원 외과 파트에서 출장진료 의뢰가 오면 그곳으로 바로 달려간다. 하루 8시간 일할 경우 그의 수입은 120만원. 전신마취가 2건 이상 있는 날은 그 배의 돈을 벌 수 있다. 한 달 동안의 ‘아르바이트’로 그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3000만원 정도. 그 이상의 돈을 벌 때도 있다. 사업자 등록증을 낸 일이 없으니 세금 낼 일도 없다.

    물론 하루 8시간씩 마취행위를 하는 그의 삶은 항상 긴장의 연속이다. 혹 의료사고라도 나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므로 지금 받는 돈도 그리 많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김씨는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통증클리닉 개원을 위해 앞으로 2년 더 보따리 장수를 할 생각이다.

    “종합병원 연봉이래 봐야 8000만원 정도가 최고입니다. 병원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꽉 짜인 스케줄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데 굳이 취직할 이유가 없죠. 가족들 보기에 그렇고 사람들 만나면 명함 내밀기가 쑥스러워 그렇지, 할 만합니다.” 김씨는 프리랜서의 설움을 개업을 위한 값진 인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한다.

    마취과 전문의들 사이에 ‘아르바이트’ 열풍이 불고 있다. 해마다 종합병원을 빠져나가는 마취과 전문의는 속출하고 있으나 개업하는 전문의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만큼 프리랜서 의사가 늘고 있다는 얘기다.



    대한병원협회(이하 병협)의 조사 결과 지난해 전국 400병상 미만 중소병원 144곳의 병원에서 빠져나간 마취과 의사는 모두 42명. 총 120명 중 35%가 빠져나간 셈이다. 그러나 이중 개업한 사람은 10여명도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머지는 모두 프리랜서. 올 4월 말 현재 마취과 전문의 2481명 중 개원의와 대형 병원 소속 전문의가 1100명 정도(수련 병원 이상)고, 중소 병원이나 일반 병원에 소속된 전문의 700여명을 고려하더라도 700명 정도가 프리랜서로 활동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이렇게 생긴 종합병원 마취과 의사의 결원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병협의 조사 대상 144곳에서 지난해 42명의 마취과 의사가 빠져나간 후 현재까지 충원된 수는 8명뿐. 나머지 34명의 마취과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 때문에 각 병원들은 응급수술의 경우에도 프리랜서 마취과 의사를 불러 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마저도 숫자가 모자라 이들의 시간당 진료비는 지난해 10만원에서 15만원으로 훌쩍 뛰었다. 결국 프리랜서가 되기 위해 마취의가 종합병원을 떠난 후 그 자리가 충원되지 않음으로써 프리랜서 의사의 진료단가만 계속적으로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다.

    지방이 더욱 심각하다. 인천 중앙길병원의 경우 대학병원인데도 마취과 의사가 1명밖에 없고, 마취과 수련의는 단 한 명도 없는 실정이다. 기독병원의 경우도 마취과 의사는 한 명뿐이다. 두 병원 모두 정원은 10명 이상이다.

    K대 의대 이모 교수(정형외과)는 “마취과 의사의 스케줄에 따라 전체 병원의 수술 일정이 바뀌고 있다. 응급수술 환자라도 생기면 그날 잡힌 모든 수술이 순차적으로 연기되고 이는 바로 환자의 피해로 연결된다”고 마취과 의사 부족의 심각성을 토로했다.

    병원에 적을 두고 실제로는 출장진료에만 골몰하는 얌체 의사도 많다. 인천 K병원 마취과 의사가 바로 그런 경우. 이 병원에는 마취과 의사가 2명 있지만 실질적으로 한 명은 오후 진료를 하지 않는다. 병원과 처음부터 오전만 진료하기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 그는 오후에는 인천 시내를 돌아다니며 진료하고 밤까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는 “병원에 적을 두고 있으니 주위 눈치 보지 않아 좋고, 병원으로서도 전체 연봉이 줄어든 데다 필요할 때 시간당 계산을 해주니까 더 유리하다”고 설명한다. 즉 대학으로 치면 시간강사인 셈이다.

    서울시 압구정 성형외과 타운이 주무대인 이모씨(42)는 통증클리닉을 차려놓고, 오히려 출장진료에 주력하는 마취과 전문의이자 의학박사. Y의대 교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강서구 변두리 지역에 통증클리닉을 개설한 후 진료는 압구정 성형타운에서 한다. 그는 박사급 마취과 전문의인 까닭에 압구정에서 인기 최고의 출장진료 전문의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마취과 의사가 대학교수 생활을 마다하면서 보따리 장사에 나서는 이유는 역시 돈이다. “압구정 가서 전신마취 한 번 해주면 1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는데 교수 부러울 게 없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느니, 비록 ‘보따리 장수’란 이야기를 듣더라도 돈 많이 벌고 열심히 일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의학박사 이씨는 거두절미하고 이렇게 답한다.

    대한마취통증학회 김종학 홍보이사(이화여대 의대 교수)는 “마취과 진료에 대한 의료수가가 워낙 낮게 책정돼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다른 의사의 70%에도 못 미치는 연봉을 받고 누가 대학병원에 있으려 하겠는가. 하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이며 수련의(레지던트)의 공급이 많아지면 병원의 마취과 전문의 부족 현상과 보따리 장수 증가현상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마취과 의사들 “보따리 장수가 더 좋아”
    연세대 의대의 한 관계자는 “외과계통 의사의 개업 붐이 계속되는 한 마취과 보따리 장수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성형외과 등 일반외과 의원에서 일주일에 몇 번 있는 전신마취를 위해 마취과 전문의를 고정적으로 둘 수도 없고, 마취과 전문의도 눈칫밥 먹으며 일반 의원에 속해 있지 않으려 할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

    이처럼 마취과 전문의의 탈병원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병원들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대한의사협회 공식 기관지와 내부 인터넷에는 마취과 전문의를 구하는 종합병원의 애타는 호소문이 올라오고 있지만 여전히 지원자는 없다.

    동인천 길병원 이수찬 원장은 “이러다 응급환자가 왔는데 마취과 의사가 없어 환자가 죽는 일이 일어날까 두렵다”고 말한다. 그는 “마취과 의보수가는 낮은데 시간당 아르바이트비는 올라가는 상태에서 수술을 하면 할수록 적자가 누적되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잘못된 의료보험 정책을 꼬집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마취과 보따리 장수의 시간당 단가가 인상되면서 일부 성형외과 타운에서는 마취과 전문의를 부르지 않고 일반 의사가 마취를 하는 것이 보편화되고 있다는 점. 대한성형외과학회 국광식 대변인은 “웬만한 국소마취는 성형외과 전문의가 하고, 전신마취만 마취과 전문의를 부른다”고 말한다. 그는 “압구정에서 종종 마취 관련 의료사고가 발생하는 것도 출장진료 전문 의사가 환자의 마취가 깨기 전까지 있어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현행 의료법에는 마취의 경우 국소마취나 전신마취의 구별 없이 전문의면 누구나 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어 마취사고의 위험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사업자 등록을 한 의사라면 출장진료를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죠. 다만 계속되는 진료단가 인상과 소속감의 결여가 환자에 대한 성실성의 결여로 이어진다면 그 피해는 모두 환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 우석균 기획실장은 국내 의료사고의 70% 이상이 마취과정에서 일어난다는 통계와 ‘책임의료’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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