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43

2002.07.18

불후의 명작이 넝마쪼가리로 변하다

  • < 노성두/ 미술사가·서울대 미학과 강사 > nohshin@kornet.net

    입력2004-10-15 15: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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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후의 명작이 넝마쪼가리로 변하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아무리 미술과 담 쌓고 사는 사람도 “아, 그거!” 하는 그림이니 건축으로 치면 바벨탑, 조각 작품 가운데는 고대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쯤에 비길 만하다. 이탈리아 대통령이 누군지는 몰라도 레오나르도라고 하면 다 아는 것을 보면 예술가라는 직업도 꽤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레오나르도가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더라면 모나리자 같은 평범한 아줌마를 기억하는 사람이 오늘날 하나라도 있었을까? 그런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이 바로 밀라노의 코르소 마젠타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 식당 벽화인 ‘최후의 만찬’이다.

    작품 주문자는 로도비코 스포르차. 열강의 각축장이던 밀라노를 무적의 요새 도시로 복구하고 롬바르디아의 문화 중심지로 일궈낸 슬기로운 군주인 동시에 무지막지한 독재자였다. 1494년 공작위를 계승한 스포르차는 먼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의 제단부 재건과 수사들의 식당 벽화 작업을 서두른다. 교회를 자기네 스포르차 가문의 가족묘로 조성하기로 하고 내부 리모델링에 뒷돈을 댄 것이다. 건축부의 시공에는 훗날 베드로 대성당 신축 플랜을 지휘하게 될 브라만테를 고용했고 벽화 쪽에는 ‘신과 같은 재능을 지녔으며 창조주와 겨루어 조금도 뒤지지 않았던’ 레오나르도에게 일감을 맡겼다. 레오나르도는 마침 밀라노 궁정의 수석 엔지니어이자 스포르차의 전속 작가로 활동하던 참이었다.

    레오나르도는 1494년 벽화 주문과 동시에 작업에 착수한다. 그러나 그의 붓질은 더디기 짝이 없었다. 까탈스런 수도원장의 끈질긴 채근에 힘입어 3, 4년이 지나서야 완성을 보게 된다. 남들 눈에는 하릴없는 게으름뱅이 화가로 비쳤겠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태만한 천성 탓은 아니었다. 같은 시대 주교를 지낸 마태오 반델로의 증언을 보면 레오나르도는 ‘꼭두새벽부터 깜깜한 밤까지 작업 비계 위에서 살았고… 때로는 팔짱을 낀 채 그림을 노려보기만 하다가 하루를 허송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먼 길을 바삐 달려왔다가 제자들 얼굴 위에 붓질 한두 차례 문지르고 다시 사라지는’ 식이었으니 그나마 끝을 낸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레오나르도의 손목을 붙잡아맸을까?

    레오나르도의 역작이 500년 동안 온갖 수난

    불후의 명작이 넝마쪼가리로 변하다
    ‘최후의 만찬’을 보면 몇 가지 재미난 점이 눈에 띈다. 우선 벽화에서 몇 걸음 뒤로 떨어져 바라보면 그림 속의 천장 모서리 선과 실제 식당 벽면의 천장 모서리 선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원근법적 공간 계산이 어찌나 정확한지, 수도원 식당에서 식탁을 잇대놓고 식사하는 수사들은 예수의 제자들과 한자리에서 만찬을 나눈다는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또 하나, 만찬 장면이 전혀 경건하지 않다는 점도 아주 뜻밖이다. 다른 화가들은 그때까지 식탁에 둘러앉은 예수와 제자들을 하나같이 성스럽게 그리려고만 애썼다. 그래서 제자들도 서로 혼동하지 않도록 이름표를 하나씩 달고 엄숙한 표정에다 꼿꼿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교회에서도 그런 그림을 반겼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성스러운 것하고는 영 거리가 멀다. 피자집 부뚜막에 불이 나도 이 정도일까 싶다.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구상하면서 예수를 식탁 복판에 앉혀두었다. 제자들은 양쪽에 나누어 자리잡았다. 식탁 앞쪽을 비우고 반대쪽에 등장인물들을 한꺼번에 모아 배치하는 구성은 레오나르도 이전에도 있던 미술의 오랜 전통이다. 예수는 표정이 무겁다. 입술도 굳게 닫혀 있다. 그러나 조금 전,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서운 말을 한마디 뱉어냈다.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터인데, 그 사람도 지금 나와 함께 먹고 있다.”

    이 말이 세찬 폭풍우의 씨앗이 되었다. 제자들은 기겁해 술렁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잔인한 선언인가? 마지막 식탁을 앞두고 장차 일을 상의한다거나 뒷일을 당부해도 서운할 판에 예수는 제자들과 인연을 아주 끊을 작정인가 보다.

    제자들은 혼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요한은 슬픔에 겨워 고개를 숙이고 베드로는 부릅뜬 눈으로 배신자를 찾는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몰래 품안에 끌어당기면서 예수의 눈치를 살핀다. 제자들의 움직임은 평화로운 해안을 유린하는 해일처럼 우정과 신뢰의 둑을 허물고 범람한다. 제 가슴에 손을 얹고 결백을 외치기도 하고 의심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기도 한다. 웅성거림은 곧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 거세게 출렁이기 시작한다. 벌떡 일어나는 사람, 굳은 표정으로 탄식하는 사람, 옆사람을 떠미는 사람, 소리치며 제 주장을 떠벌리는 사람들은 마치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보인다. 예수의 한마디가 잠자는 바다를 깨웠다. 술렁이는 흥분의 바다는 결코 잠잠해질 수 없을 것이다.

    소란의 와중에서 예수는 뿌리깊은 나무처럼 흔들림이 없다. 넓은 식탁 한복판에 예수는 홀로 존재한다. 한때 스스로를 빗대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했던 비유가 떠오른다. 휘몰아치는 예고의 잔인한 회오리바람 앞에서 어린 포도가지들은 절망적으로 나부낀다.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의 속마음을 따라잡지 못했나 보다.

    불후의 명작이 넝마쪼가리로 변하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에서는 1500년 동안 지켜오던 성찬식의 성스러움은 온데간데없다. 이것이 위기에 처한 인간의 참모습일까? 그렇다면 레오나르도는 제자들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낸 셈이다. 예수는 이윽고 팔을 뻗어 음식을 집어든다. 빵을 떼고 포도주 잔을 들어 당신의 몸과 계약의 피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나눌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는 예수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제자의 배신을 선언하는 스승의 심경은 얼마나 황량한 것이었을까? 레오나르도는 한없이 쓸쓸하고 황폐한 영혼을 예수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통해 표현했다. 이로써 화가의 붓이 예술의 깊은 바다에서 영혼의 표정을 건져올리기 시작한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모인 도미니크회 수사들은 벽화 속 다가올 죽음을 예감하는 예수와 그의 최후를 숨죽이고 기다리는 배신자의 떨리는 시선을 바라보며 마치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고요하면서 불안한 긴장을 상상했을 것이다.

    ‘최후의 만찬’은 공개되자마자 예술의 기적으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 후 작품의 명성에 못지않은 혹독한 운명을 겪게 된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림은 마치 좀이 잔뜩 슬어버린 누더기처럼 보인다. 이것은 벽화를 프레스코 기법 대신 달걀을 안료에 섞어 쓰는 템페라 기법으로 그렸기 때문이었다. 벽에 물감이 스미지 않고 겨우 달라붙어 있는 상태에서 붓을 뗐는데, 그게 결국 탈이 나고 말았다.

    ‘최후의 만찬’은 완성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벽화 바닥이 들뜨기 시작했다. 수도원 식당의 습기가 벽에 스며들면서 곰팡이가 슬고 벽에 균열이 났다. 비가 잦은 겨울철에는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건조한 여름철에는 예수와 제자들 얼굴에 버짐이 피어올랐다.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물감 더께가 가뭄 논바닥처럼 갈라지는가 싶다가 또르르 말려 떨어지곤 했다니, 자연의 질투라고 보기에는 너무 가혹한 운명이었다.

    ‘최후의 만찬’이 그려지고 50년 뒤 전기작가 아르메니니는 ‘이제 반타작도 못 건지게 생겼다’며 한숨을 지었다. 1556년 레오나르도의 원작을 연구하러 밀라노에 들렀던 바사리는 ‘얼룩 덩어리밖에 남은 게 없다’고 탄식했다. 또 1642년 스카넬리는 ‘넝마쪼가리 벽화에서 그림 주제를 알아내려면 다들 고생깨나 할 것’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한때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벽째 뜯어가려고 욕심냈을 만큼 빼어난 걸작은 이제 기억 속의 빛 바랜 신기루가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1662년 도미니크 수사들이 출입구가 좁다며 식탁 아래를 털어내고 문을 내는 바람에 한복판에 앉았던 예수의 두 다리가 잘려나갔다. 문은 나중에 다시 메웠지만 예수는 영원히 하반신 불구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벽화가 감당할 운명의 전조에 불과했다. 진정한 비극은 벽화 복원과 함께 진행되었다.

    첫 복원은 나름대로 전문가를 자처하던 레오나르도 벨로티가 맡았다. 벽면에서 곰팡이를 걷어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템페라 위에다 유화를 덧칠하는 바람에 색채 균형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평가는 찬반 양쪽이 갈렸다. ‘극한의 인내와 집중력으로 레오나르도를 되살렸다’는 찬사와 ‘레오나르도는 영구히 망실되었고 전혀 엉뚱한 새 그림을 그렸다’는 비난이 함께 쏟아졌다. 작업진행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파란 하늘을 빼놓고는 죄다 거덜났다는 게 중평이다. 그 후 1770년 주세페 마차가 복원에 달려들면서 수난은 계속된다. 안 그래도 풍치처럼 들떠 있는 벽화를 굴뚝 청소용 쇠갈퀴로 사정없이 긁어 파기 시작한 것이다. 신부님이 놀라 달려왔을 때는 제자 셋만 빼고 벽면 전체가 말끔해진 상태였다.

    그 후 ‘최후의 만찬’은 아무도 거들떠보는 이가 없다 1726년 나폴레옹 군대가 밀라노에 진격하면서 재앙이 이어진다. 교회가 마굿간으로 전용된 것은 어떤 무지한 장교의 짓이었다고 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앞에서 군마들은 여물을 씹고 배설물을 쏟아냈다. 폭우 때문에 교회 바닥이 아예 물에 잠긴 적도 있었다.

    1855년 밀라노시는 다시 벽화 복원에 달려든다. 그러나 또 허사였다. 마른 가랑잎처럼 달랑거리는 색채를 더 이상 벽면에 붙들어맬 방도가 없었다. 1891년 벽면 전체를 떠내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뒤이어 크고 작은 복원 시도가 되풀이되면서 레오나르도의 걸작은 역사의 먼지 속으로 거의 완벽하게 침몰해 갔다.

    20세기에도 복원 노력은 식지 않았다. 스러지는 것일수록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까? 1924년 오레스테스 실베스트리가 엉뚱한 꾀를 냈다. 인두를 달구어 그림에 대고 누르면 색채가 자글자글 녹으면서 벽에 달라붙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두를 너무 달구었던 게 문제였다. 색면이 마구 엉겨붙는가 싶더니 제멋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명색이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작품인데 플라스틱 바가지 땜질하듯 했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1943년 이번에는 수도원 전체가 내려앉았다. 지붕과 벽체가 공습을 받고 폭삭 주저앉은 것이었다. 그러나 천우신조였을까? ‘최후의 만찬’이 그려진 벽면만은 무사했다. 미리 공습을 예견하고 모래주머니로 방벽을 버텨둔 덕분이었다. 그러나 종전이 될 때까지 날아간 지붕을 수리하지 못해 3년 동안 예수와 제자들은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으며 팔자에 없는 노숙생활을 견뎌야 했다.

    1947년 마우로 펠리촐리가 복원에 나서면서 그간의 덧칠을 상당부분 제거했다. 그러나 500년 가까이 눌어붙은 검댕을 떼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복원 작업은 파닌 브람빌라가 1980년에 시작한다. 이번에는 레오나르도의 진필만 남기고 모든 덧칠과 가필을 제거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하루 작업량도 동전 크기를 넘지 않을 만큼 신중했다. 완전히 없어진 부분은 희미한 수채물감으로 보완하는 데 그쳤다. 20년 동안 진행된 마지막 복원이 끝나고 그림이 공개되자 마침내 레오나르도의 숨소리가 되살아났다. 어두운 벽면이 창문처럼 투명해지고 식탁의 웅성거림과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식탁 위에 반짝거리는 그릇에는 제자들 옷 색깔이 묻어나고 눈부신 물병에 찰랑대는 빛이 어렸다.

    이런 게 바로 예술의 기적이 아닐까? 비록 누더기가 되긴 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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