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3

2011.06.27

유럽 휩쓴 한류 뒤편 ‘아이돌’ 스타는 아파한다

케이팝과 청소년의 정신건강

  •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의학박사 psysohn@chollian.net

    입력2011-06-27 11:2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유럽 휩쓴 한류 뒤편 ‘아이돌’ 스타는 아파한다

    케이팝의 주역인 ‘동방신기’(위)를 보려고 공항 입국장에 모여든 유럽 한류팬(아래).

    유럽발(發) 한류가 불고 있다. 프랑스 파리 제니트 공연장에서 열린 SM타운 라이브 공연이 성황리에 끝난 데 이어, 6월 19일 아이돌 그룹 샤이니가 비틀스가 음악을 녹음했던 영국 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나타나자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 팬 800여 명이 몰렸다. 푸른 눈, 금빛 머리의 한류 팬이 열광하는 모습에 뿌듯함이 느껴졌다.

    아이들 희생으로 성장한 케이팝

    필자는 미국이나 유럽 가수의 음악을 들으면서 ‘왜 우리 가요는 저들 수준에 미치지 못할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 수준은 구미에 비해 한 수나 두 수 아래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던 것. 그러나 1980년대 조용필 시대가 도래하고,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옛날 얘기가 됐다.

    HOT와 god를 거쳐 지금은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동방신기, 빅뱅, 2AM, 2PM, 원더걸스, 카라, 애프터스쿨 등 헤아리기 힘든 수많은 스타 그룹이 가요계를 이끈다. 우리 음악 수준이 점차 향상돼 이제는 팝송보다 가요를 더 즐겨듣게 됐다. 과거 소니 워크맨이나 모토로라 휴대전화를 자랑스럽게 갖고 다녔으나 이제는 삼성이나 LG 제품을 더 선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재 대형 기획사가 우수한 기획력과 홍보, 그리고 질 좋은 음악을 제공하면서 가수를 만들어낸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된다. 많은 가수가 10대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소녀시대는 데뷔 시절 멤버 대부분이 10대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10대 청소년이 스타를 꿈꾸며 땀을 흘린다. 문제는 이 과정이 대형 기획사 또는 영세한 매니저에 의해 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영국의 BBC 방송은 6월 14일 ‘케이팝 성공신화 이면에는 노예계약이 있다’고 분석했다. 장기간의 불평등 전속계약을 토대로 케이팝이 해외 수출을 일궈냈다며, 2년 전 최고 인기그룹 동방신기 세 멤버와 소속사 간 법정 소송을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동방신기 세 멤버는 13년이라는 계약 기간이 너무 길고 제약이 많으며 수익금 분배도 거의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소속사를 고소했다.

    법원은 가수의 손을 들어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연예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계약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표준 계약서를 마련했다. 6월 17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청소년 연예인의 인권보호 조항을 새로 넣어 개정한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약관)를 확정했다.

    정부가 청소년 보호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2010년 8월 여성가족부 설문조사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청소년 연예인 10명 중 1명이 ‘성적(性的) 노출’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9.1%는 무대와 촬영장에서 애무, 포옹, 키스를 경험했다고 응변했다. 음담패설이나 성희롱 등 선정적 암시가 담긴 말, 행동을 경험한 청소년 연예인도 4.5%나 됐다.

    연예인이기에 앞서 청소년

    유럽 휩쓴 한류 뒤편 ‘아이돌’ 스타는 아파한다

    한글로 쓴 환영 문구를 들고 열광하는 유럽 한류팬.

    이어지는 설문조사 결과 역시 놀라웠다. 그들은 학습권을 침해당했고, 장시간 근로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인 필자가 청소년을 상담하다 보면,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아이를 만나게 된다. 아이 대부분은 현실도피적 차원에서 연예인을 지망한다. 학교에 다니기 싫거나 현실 적응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이 화려해 보이는 연예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음악과 춤 또는 연기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데도 부모를 졸라 연예인 훈련 기관이나 학원에 다닌다. 처음에는 내켜 하지 않았거나 반대하던 부모도 자식의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후원한다. 돈도 꽤 많이 든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현실의 냉혹함과 마음의 상처다. 유명 연예인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깨달으면 오히려 다행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자신들을 존중하지 않고, 상품으로 취급하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청소년은 발달 과정에 있다. 몸은 거의 다 자라 어른과 비슷해졌을지 모르지만, 마음과 정신은 아직 어린 상태다. 따라서 여러 요인을 골고루 고려해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또한 거절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자기 감정이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쉽다. 주변 어른의 권유와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는 ‘좀 더 노출하라, 공부가 뭐 그리 중요하냐, 시간을 초과해 일하라’라는 어른의 부당한 요구를 성공의 지름길이라 생각하며 따르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무기력감이 아이를 감싼다. 당연히 우울해지고 불안해진다.

    성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은 여자 청소년 연예인은 특히 정신과적 문제에 취약하다. 성적 경험을 한 소녀는 성인이 된 뒤 성적 문란이나 억압 같은 극단적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 조사에서도 여자 청소년 연예인 및 지망생(50명)의 경우 불면증(64.3%)을 겪거나 우울증 약을 복용(14.3%)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연예인이기에 앞서 청소년이다. 청소년을 보호하고 잘 자라게 하는 것은 어른과 사회의 중요한 책무다. 정부 대책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연예인 관련 사업에 종사하는 어른의 생각이다. 연예인 청소년을 상품으로만 보지 않고, 인격이 형성돼가는 사람으로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소년 발달에 대한 기본 지식과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그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눌 때 가능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