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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익의 미식생활

벌레 먹은 자연산 배 배꽃 향기가 거기 있더라!

먹골배

  • 황교익 blog.naver.com/foodi2

벌레 먹은 자연산 배 배꽃 향기가 거기 있더라!

벌레 먹은 자연산 배 배꽃 향기가 거기 있더라!

관리하지 않아 아주 작게 자란 먹골배다. 맛은 진짜 배다.

먼 옛날부터 한반도에 배가 있었다. 야산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야생 배가 그 배다. 이를 가꾸면 제법 먹을 만한 크기가 된다. 우리 조상은 이 배를 먹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먹는 배는 이것과 관련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들어온 품종과 이를 바탕으로 근래 한국에서 개량한 품종의 배를 먹는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품종은 장십랑, 금촌추, 만삼길, 신고, 행수, 신수, 이십세기 등인데 지금도 널리 재배한다. 특히 신고는 현재 국내 배 재배면적의 70~80%를 차지한다. 화산, 황금, 추황, 원황, 한아름 등 국내 육성 품종이 꾸준히 선보이지만 신고에 밀려 빛을 보지 못한다.

그런데 요즘 배는 맛이 없어 거의 맹탕이다. 추석 때 받은 선물 중 반갑지 않은 것이 배다. 그러니 제 돈 주고 사는 일도 자꾸 줄어든다. 한때 한국 배가 맛있다고, 외국에 수출한다고 했는데 그 맛이 엉망이 된 것이다. 이는 배를 제대로 익히지 않고 때깔만 내 출하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신고를 이렇게 많이 심는 것은 맛있기 때문이 아니다. 추석과 설이라는 ‘배 특수’에 맞추기에 이 품종이 딱 좋기 때문이다. 제수와 선물용 배 시장에서 신고가 가장 좋은 가격으로 가장 많이 팔린다. 농가는 이 두 명절에 잘 팔 수 있는 품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신고가 적당한 것이다. 신고는 여느 배와 달리 저장성이 좋아 추석에 팔다 남으면 설에도 팔 수 있다. 그런데 신고는 중만생종이라 대체로 추석 전에 익지 않는다. 이를 해결하려고 농가에서는 지베렐린이라는 성장촉진제를 쓴다. 지베렐린은 배를 급격히 키우지만 익는 것과는 관련 없다. 그러니까 덩치만 큰, 익지 않아 당도가 떨어지는 신고를 시장에 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익지 않은 배를 연중 보관해 파는 것이다. 그러니 맛이 있을 리 없다.

서울 태릉 인근 중랑구에 묵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원래 이름은 먹골인데 일제강점기에 한자어인 묵동으로 바뀐 것이다. 이 동네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배가 맛있기로 유명했다. 이곳 배를 먹골배라 하는데, 배 재배 농가가 아직 몇 군데 남았다. 물론 먹골배는 토종 배가 아니다. 1920년대 일제가 먹골에 배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유명해진 것이다. 예전에는 장십랑이 많았는데 요즘 품종도 이것인지는 모르겠다.

얼마 전 태릉에 갈비를 먹으러 갔다. 이곳 갈비는 일명 태릉갈비라 하는데 배 과수원에 자리를 마련하고 구워 먹는다. 1970년대 들어 생긴 음식으로, 지금도 과수원이 남은 식당이 있다. 그런데 내가 간 곳은 과수원이 관리가 되지 않았다. 배보다 갈비 파는 것이 더 남는 장사기 때문이다. 이곳의 배는 비료도 주지 않았고 지베렐린도 뿌리지 않았으며 봉지도 씌우지 않았다. ‘자연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배는 아주 작았고 군데군데 벌레 먹은 자국도 있었다. 식당 주인에게 부탁하니 적당히 따서 먹으라 했다. 배를 깎아 맛을 보았는데 생각 외로 달았다. 부드럽고 과즙도 풍부했다. 시중의 배와 확연히 다른 건 바로 향이었다. ‘화~’ 하게 번지는 향에 온몸이 쩌릿했다. 배꽃의 향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엉터리 배를 먹는지 이 작은 배 하나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과수원이 있는 태릉갈비 식당에는 봄에 손님이 많다. 꽃이 화사하게 핀 배나무 아래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태릉갈비는 가을에 먹으러 가는 것이 더 낫다. 갈비맛이야 그게 그거지만, 아무렇게나 자란 ‘야생’ 배를 맛볼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단, 다른 손님을 위해 한두 개씩만 맛보시라!



주간동아 2011.10.31 810호 (p60~60)

황교익 blog.naver.com/food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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