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1

2009.01.27

‘문화 식민지’ 그 바닷가에도 아름다운 추억은 있다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9-01-29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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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 식민지’ 그 바닷가에도 아름다운 추억은 있다

    정동진역 앞의 광장. 정동진은 서울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있는 나루터 마을이라는 뜻.(좌)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이 대단한 구경거리가 되는 기이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드라마의 한 장면이 관객의 눈시울을 적시고, 또 그 가녀린 감성의 떨림이 우연히 찾아간 곳에서 ‘아하, 여기가 거기였구나!’ 하고 문득 고개 돌려 찾게 하는 것은 소박한 일에 속한다. 대세는 각 지역마다 아예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을 유치하러 나서고, 그렇게 해서 급조한 세트를 줄지어 구경하러 다니는 게 풍습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옛 일상문화의 ‘복원’도 아니고 ‘재현’도 아니고, 다만 드라마나 영화를 찍기 위해 ‘급조’한 것임에도 그런 일이 줄지 않는다. ‘태조 왕건’ ‘대조영’ ‘대장금’ ‘불멸의 이순신’ ‘태왕사신기’ ‘상도’ ‘이산’ ‘대망’…. 어느 한때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에 불과한데도 이 작품들이 제작된 각 지역의 세트장은 지역 관광의 대표로 올라가 있다. 속초에 가면 설악산 미시령 쪽으로 향하는 거의 모든 표지판이 ‘대조영 촬영지’를 가리키고 있다.

    서울과 수도권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버린 우리 현대사의 뼈저린 개발의 그림자 때문에 이렇게 해서라도 지역 관광 활성화를 촉진해야 하는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지역의 역사적 경험과 무관한 드라마 촬영지의 난립은 궁극적으로 그 지역의 오랜 생명의 문화, 삶의 내력, 작고 소박한 이야기들을 가볍게 밟아버리게 된다. 대조영이나 왕건이나 이순신이 평생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가서, 드라마 촬영을 위해 만들어놓은 세트를 보는 일은 역사 공부도 아니고 문화 체험도 아닌 것이다.

    집단적 관광문화에 해체당한 공간

    소설가 이순원의 그대 정동진에 가면은 바로 그곳에서 쓰고, 그곳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강릉 출신의 이 중진 소설가는 연애소설의 틀을 빌려 고향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던 때의 애틋한 기억들을 차분하게 풀어나간다. 그대 정동진에 가면의 주인공 박석하. 소설가가 된 박석하는 어린 시절 지독히도 가난하게 살던 정동진을 회상하며 마음속 연인이던 김미연을 찾아나선다. 가난이 처음으로 부끄러웠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박석하의 마음을 정동진으로 이끈다.



    실은 이 강릉 출신 작가의 기억에 따르면 ‘정동진’은 정동진이 아니라 ‘정동’이어야 한다. 강릉 사람들은 오랫동안 ‘정동’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다가 드라마 모래시계에 의해 정동진이 됐다. 사소한 일이지만 지역 나름의 역사와 문화가 외부의 강한 압력에 의해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명명이다.

    ‘문화 식민지’ 그 바닷가에도 아름다운 추억은 있다

    1994년 TV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정동진역과 플랫폼에 선 기차.

    소설은 서울이라는 문명이 짓밟아버린 문화의 식민지 정동진을 보여준다. 탄광지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모텔이 늘어서기 시작한 것이야 산업의 변천에 따른 누수 현상이지만, 소박하고 정겨웠던 바닷가의 간이역과 마을이 드라마 하나 때문에 삽시간에 관광과 유흥과 노래방과 인형뽑기 오락과 주차 시비와 말다툼의 장이 되고 말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모조리 사라졌다. 이웃끼리 정담을 나누던 풍경은 찾아볼 길이 없어졌다. 지역 사람들 모두가 모래시계 장사꾼이 되고 마는 중앙문화의 이 강력한 펀치력!

    주인공 박석하는 참담해진다. 박석하는 김미연과 함께 옛 기억의 행로를 따라 버스를 타고 헌화로(왼쪽 사진)로 간다. 헌화로는 강릉 일대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서 깊은 해안도로다. 이순원은 이같이 묘사한다.

    수십 미터의 절벽을 다시 깎아 길을 낸 것이 아니라 절벽은 그대로 두고 그 절벽을 따라 바다에 잠길 듯 길게 떠 있는 바위 위에 돌을 깔아 바다와 거의 같은 높이로 길을 낸 것이었다. 왼쪽으로는 검푸른 바다로부터 흰 파도가 자동차에 바로 부딪힐 듯 밀려들고, 오른쪽은 또 검붉은 색으로 층층을 이룬 기암절벽이었다.

    헌화로와 수로 부인

    이 헌화로의 연원은 저 삼국유사의 ‘수로 부인’편까지 올라간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게 되어 행차를 하다가 바닷가에 머물러 점심을 먹게 되었다.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처진 곳인데 높다란 곳에 철쭉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이에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꽃을 꺾어 바칠 사람이 그 누구인고?” 하자 아랫사람들이 “사람의 힘으로 가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암소를 끌고 가던 늙은이가 수로 부인에게 꽃을 꺾어 바치며 노래 또한 읊었다는 얘기다.

    자줏빛 바위갓에

    잡은 손 암소 놓고

    날(我) 아니 부끄러이 하려든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이에 대하여 국문학자 조동일은 당시 경주 변방의 민심이 소란하자 순정공은 힘으로 이를 다스렸고, 그 부인은 굿으로 다스렸다고 추측한다. 동해안 일대를 돌면서 굿을 하였는데 이를 ‘꽃거리’라 불렀고 달리 ‘헌화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이다. 불교를 치국의 이념으로 삼았지만 원시 무속이 통하는 해안 지방에서는 굿을 통해 민심을 다스렸다는 전제에서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절세미인 수로 부인에 대한 민심의 가없는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에 근거해 위험을 무릅쓰고 꽃을 꺾어 바치는 노옹(老翁)을 생각하면 신라의 활기찬 습속이 연상된다.

    그래도 기억해야 할 애틋함

    아무튼 그대 정동진에 가면의 주인공은 정동진 고갯마루 넘어 심곡에서 옥계에 이르는 헌화로로 가게 되는데, 이 길이 있어 다행히도 박석하와 김미연은 옛 연인들만이 나눌 수 있는 말을 주고받는다. 이 헌화로에서 박석하는 자기 마음속의 ‘꽃’을 미연에게 바치려 하지만 미연은 거절한다. 돌아설 때가 된 것이다.

    소설가 이순원은 박석하를 통해, 그의 못다 이룬 사랑을 통해, 가히 폭력적인 집단적 관광문화 앞에서 해체당한 정동진의 옛 기억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러한 아름다운 시도는 늘 위태롭게 패배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 한 번은 들르게 될 정동진이라면 이곳 사람들의 애틋함만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호승의 시 정동진이 들려주는 것처럼….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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