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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형의 별★걸 다 모으는 여행 ②

영수증 한장 한장 아련한 추억 새록새록

  • 여행작가·트래블게릴라 멤버 www.traveldesigner.co.kr

영수증 한장 한장 아련한 추억 새록새록

영수증 한장 한장 아련한 추억 새록새록

1. 탄자니아에서 세렝게티 투어를 예약하고 받았던 영수증.
2. 시간이 흐르면 영수증의 잉크가 이렇게 날아간다. 바르셀로나에서 받은 영수증.
3. 영수증 구실까지 하는 버스표는 개인비서처럼 어디를 다녔는지 꼼꼼히 기억해준다.
4. 9월 이탈리아 여행의 순간들을 추억하게 해주는 영수증들.

“언니, 우리 지난주에 무라노 섬에서 먹었던 그 맛있는 피자집 이름이 뭐죠?”

“피자집? 가만있어 봐. 영수증 좀 뒤져보고 전화해줄게.”

그렇다. 나의 특별한 여행 컬렉션의 두 번째 주인공은 바로 영수증이다. 영수증을 모으는 것이 무슨 컬렉션이냐고? 나에게는 루이비통의 ‘신상’ 가방 하나보다 더 값진 것이 영수증에 묻어 있는 추억이다. 영수증을 모으는 것은 추억의 한 장면을 컬렉션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찢고 붙이는 인형놀이 따위는 열 번쯤 졸업했어야 할 나이 즈음이었던 것 같다. 두 번째 태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 열흘쯤 지나 바삐 돌아가는 하루하루에 정신이 혼미해지던 때였다. 방구석 박스 안에 있는 영수증이 눈에 띄었다. ‘버릴 것’과 ‘보관할 것’을 분류하던 그 박스들 중 영수증은 ‘버릴 것’이라고 쓰인 박스에 꼬깃꼬깃 방치돼 있었다. 무심코 영수증 한 장을 펼쳤더니 태국 전통음식점에서 맛있게 먹었던 메뉴와 가격들이 나타났다. 가물가물하던 여행의 기억 속에 그때 맞았던 밥상이 활짝 펼쳐지면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태국에서 그 음식을 처음 받았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요술램프를 가진 지니가 마법을 부리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기분이었다. 영수증은 바로 ‘버릴 것’에서 ‘보관할 것’ 상자로 옮겨졌고 그 다음부터 나의 여행은 영수증과 함께하게 되었다.

누군가 영수증 모으는 것은 너무 귀찮은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를 위해 영수증 예찬론을 살짝 펼쳐보자. 영수증을 모아서 좋은 점 첫 번째는 하루에도 열 번씩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는 몹쓸 기억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행하면서 이곳저곳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는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잊어버리는 일이 다반사다.



영수증을 모으는 것은 게으름을 보상해주기도 한다. 여행하다 보면 가끔은 카메라도 들기 싫고 노트도 꺼내기 싫을 때가 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냥 커피 한잔 놔두고 멍하니 앉아 있고 싶을 때. 그때도 영수증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해주는 충실한 투명비서다.

영수증 모으기의 장점은 또 있다. 돈 안 들이고 모을 수 있는 최고의 컬렉션이라는 점이다. 돈을 써야 영수증이 생기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여행하면서 먹고 보고 자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 돈이 없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는 게 영수증 모으기다.

뭐니뭐니 해도 영수증의 가장 큰 구실은 아련한 추억을 담아내는 것이다. 산토리니의 에게해가 한아름 안기는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한잔 마시고 있던 그 순간 그리고 그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곱디고운 환갑의 그리스 할머니, 그 할머니와 나누던 눈빛과 미소. 세상이 다 아름다워 보이던 순간들을 담은 시걸카페의 카푸치노 영수증.

스쳐가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음을 설레게 했던 친구들과 마셨던 멕시코의 코로나와 타코 영수증. 그렇게 영수증 하나는 하나의 추억과 맞닿아 있다.

영수증도 모으다 보면 다 같은 영수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일주를 시작하던 즈음 첫 기착지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오션스 바스켓’이라는 레스토랑에서의 일이다. 싱싱한 해산물과 발랄한 분위기는 여행의 기분을 한껏 돋울 정도로 훌륭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만큼이나 행복했던 것은 나중에 받은 영수증 때문이었다. 영수증 귀퉁이에 활짝 웃는 익살스러운 그림을 그려준 것이 아닌가. 물론 팁을 받기 위한 아이디어일지도 모르지만 여행을 막 시작한 내게는 행운의 징조처럼 보였고, 그 영수증을 받자마자 노트 맨 앞에 붙여놨다.

여행지 그 감동 기억력 보완 충실한 투명비서

아프리카에서 받은 영수증은 대부분 그들의 손맛이 묻어 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기보다는 현금을 이용해 영수증을 손으로 써주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났지만 그 영수증을 보면 아직도 진지한 표정으로 글씨를 쓰던 까만 피부의 청년 얼굴이 살포시 떠오른다.

비행기표는 물론 고속버스표, 기차표 등은 행선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일 뿐 아니라 그 나라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자료가 된다. 케이프타운에서 케이블카를 타면 예쁜 카드를 영수증으로 받을 수 있으며, 산토리니에서 1유로짜리 버스를 타면 아름다운 산토리니 풍광이 담긴 버스표를 기념품으로 간직할 수 있다.

영수증 예찬론에 갑자기 영수증을 모으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으셨는지. 영수증을 모으다 보니 영수증 모으는 요령도 생겼다. 먼저 마트에 가서 얇고 작은 크기의 지퍼백을 산다. 그리고 여행 갈 때 지퍼백과 풀, 노트를 반드시 챙긴다. 날짜별 또는 주제별로 영수증이 생기는 족족 지퍼백에 넣는다. 그러고는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나 혼자 심심할 때 영수증 붙이기 놀이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영수증을 붙인 뒤 그곳에서의 느낌을 딱 한 줄만 적어놓자. 한 단어라도 좋다. 아마 영수증 모으는 그 자체를 즐기게 될 것이다.

영수증 한장 한장 아련한 추억 새록새록
PS : 진지하게 영수증 모으기를 고려하시는 분들을 위해 팁 한 가지 더. 시간이 지나면 영수증 위에 박힌 잉크가 기억처럼 사라진다. 얼마나 좋은 잉크를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소 불량한 영수증은 5년 만에도 잉크가 날아간다. 그러니 기억들을 제대로 안고 싶다면 꼭 사진을 찍어서 보관해두도록. 안 그러면 그때 영수증에 적어놓은 감상 한 줄만 남을 테니까.



주간동아 2008.10.21 657호 (p88~89)

여행작가·트래블게릴라 멤버 www.traveldesign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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