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0

2008.06.17

하나의 사건, 엇갈린 진술

  • 현수정 공연 칼럼니스트

    입력2008-06-11 10: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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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사건, 엇갈린 진술

    연극 ‘나생문’에는 가수 데니안(작은 사진)과 이건명이 사무라이 역으로 더블캐스팅됐다.

    한사건에 대한 여러 사람의 진술 내용이 각기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각자의 욕망, 자존심, 죄책감, 합리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스스로가 인정할 만한 기승전결을 지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생략과 비약’을 적절히 섞고 살을 붙인 이야기들은 모두 그럴듯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온전한’ 진실은 아니다.

    연극 ‘나생문’(연출 구태환)에서는 의문의 살인사건을 둘러싸고 엇갈리는 진술들이 펼쳐진다. 확실한 것은 사무라이가 그의 아내와 숲 속을 지나갔다는 것, 그리고 그가 칼에 찔려 죽은 채로 숲 속에서 발견됐으며 그의 값비싼 칼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무라이 의문의 죽음 그리고 사라진 칼

    재판에서 진술한 사람들은 용의자 타조마루, 사무라이의 아내, 그리고 사무라이의 혼령을 대변하는 무당이다. 타조마루는 ‘부인에게 욕정을 느껴 사무라이를 값비싼 보석이 박힌 칼을 보여주겠다며 꼬여냈다. 남편 앞에서 그녀를 겁탈했는데, 부인이 사나이답게 결투를 해달라고 매달려서 남편과 칼싸움 끝에 그를 죽이게 됐다. 이후 그 여자와 사무라이의 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말한다. 부인은 ‘타조마루가 남편을 죽이려고 해 자신이 용감하게 덤벼들어 그를 쫓아냈다. 그런데 남편이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는데, 일어나 보니 남편이 죽어 있었다’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한 뒤 ‘자신이 죽인 것이다’라고 절규한다. 무당이 이끌어낸 사무라이는 깊은 슬픔에 잠긴 채 이야기한다. ‘아내는 색정을 부리며 타조마루와 놀았고, 급기야 자신을 죽이라고 타조마루에게 시켰다. 타조마루는 아내의 표독스러움에 질려 가버렸고, 자신은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이 극에 달해 자살했다.’

    무너져가는 성문 앞에서 전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들은 스님, 나무꾼, 가발장이다. 스님은 재판 과정에서 보았던 상황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러한 스님의 모습을 본 가발장이는 역시 목격자로 재판에 참석했던 나무꾼에게 전날의 상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다. 가발장이의 호기심과 비웃음은 숨겨져 있었던 또 하나의 사실을 캐내게 되는데, 바로 나무꾼이 숲에서 사건의 전말을 지켜봤다는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사건의 진상은 그전까지 들었던 것과 사뭇 다르다. ‘타조마루는 사무라이의 아내에게 자신과 함께 살아달라고 간청하고, 그녀는 결투를 해달라고 이야기했다. 남편이 겁을 내며 싸움을 피하자 아내가 항의를 하고, 남편은 오히려 아내를 질책하며 자신과 결혼하기 전의 미천했던 출신성분을 들먹였다. 고귀한 태생이 아니라는 말에 타조마루는 여자에 대한 흥미를 잃지만, 결국 두 남자는 등 떠밀리듯 결투를 하게 되고, 싸움 과정에서 사무라이는 실수로 자신의 칼에 찔려 죽었다. 이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관아로 한달음에 뛰어갔다.’

    나무꾼의 ‘가장 진실에 가까운 듯한 진술’이 여타 진술들과 차이를 보이는 점은 절대 비장하지 않다는 것. 타조마루도, 사무라이의 아내도, 심지어 죽은 사무라이까지도 자신이 가장 멋있게 보이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사건, 엇갈린 진술
    그러나 알고 보니 나무꾼도 숨기는 사실이 있었다. 나뭇가지에 상처를 입는 줄도 모르고 관아로 뛰어갔다는 그는, 사실 숨이 끊어지지도 않은 사무라이 몸에서 칼을 훔쳐 달아나느라 그리 황망했던 것이었다. 나무꾼은 어려운 형편에 아이 여섯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말한다. 즉 천성이 악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한 것이다. 나무꾼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인간의 ‘스탠더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스님은 전날의 사건을 계기로 절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가르칠 것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세상 자체가, 인간 존재가 부조리한데 누구를 나무랄 것이며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고 그는 반문한다. 그러나 폐허와 같은 나생문 앞에서 새 생명을 줍는다는 것, 그리고 시체에서 칼을 도둑질해 아이들을 먹여 살리는 나무꾼의 모습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선과 악을 버무려 만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중생에 대해 회의주의적이면서도 희망을 머금고 있는 이중의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이 원작

    이 연극의 원작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이다. 전쟁, 지진, 굶주림에 시달리던 헤이안조의 시대적 배경이 연극에서도 느껴지는데, 특히 송장의 머리칼을 잘라서 돈을 벌고, 아기의 포대기를 빼앗아가는 가발장이가 내뿜는 독설에는 민초들의 각박함이 담겨 있다.

    전체적으로 극중극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작품의 플롯을 명확하고 깔끔하게 전달했다. 그러나 시공간이 교차할 때마다 암전이 되는데, 극의 흐름이 끊어지는 일면이 있다. 몇몇 부분은 암전 이외의 연출적 묘미로 세련된 전환을 보여주면 더욱 좋았을 듯싶다. 또한 무대가 협소한데, 대나무 숲을 활용해 효과를 극대화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 (~6월29일 두산아트센터, 문의 02-708-5001~3)

    영화 ‘라쇼몽’

    1951년 영화제 휩쓴 수작


    하나의 사건, 엇갈린 진술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인간 심리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렇지만 작가라면 한 번쯤 천착해볼 만한 주제이기도 하다. 어떠한 상황에도 잘 들어맞는 동시에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주제란 흔치 않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은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나생문’의 원작인 ‘라쇼몽’은 소설, 영화, 연극으로 모두 각광받으면서 그야말로 ‘원소스 멀티유즈’로 활용되고 있다. ‘라쇼몽’은 195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는 등 기염을 토하며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이름을 전 세계적으로 알린 작품이다. 일본 내에서는 이 작품으로 오즈 야스지로에 견주는 감독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다.

    ‘라쇼몽’은 ‘시 왓 아이 워너 시(See what I wanna see)’라는 제목의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온갖 지원금을 받으며 활약하고 있는 작사·작곡가인 마이클 존 라퀴사의 작품으로 올해 국내에 선보일 예정이다. 라퀴사는 ‘메디아’ ‘베르나르도 알바’ 등 뮤지컬에서는 잘 다뤄오지 않은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독특한 창작자이기도 하다.

    ‘시 왓 아이 워너 시’의 배경은 뉴욕으로 설정돼 있는데, 오프닝 곡에서 쓰이는 타악기 등에서만 원작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전반부는 라쇼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로, 후반부는 미국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드리우며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9·11테러 이야기로 구성됐다. 7월15일부터 8월24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 뒤, 9월6일부터 11월2일까지는 현재 연극 ‘나생문’을 공연 중인 두산아트센터의 스페이스 111에서 막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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